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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중앙문예』희곡 당선작>폭설|정미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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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등장 인물>
여인(20대) 사내(30대) 노파(90세 가량 노망기 약간)

<무대>
허술한 산촌살림을 말해주는 방. 무대 좌측으로는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이 하나 나 있고 우측으로는 바깥으로 통하는 여닫이 문. 무대 뒤쪽으로는 키 높이의 조그만 창문 하나가 있다.
천장에 끈으로 매단 알전구가 흐린 불빛을 뿌리고, 무대 좌측으로 노파와 여인,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
노파, 천천히 호흡하듯 염주를 세며 내뱉는 숨에 섞어 한마디씩 웅얼웅얼. 여인은 반짇고리로 쓰는 듯한 큼직한 함지를 앞에 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다.
역시 하나의 호흡처럼,
천천히,
습관처럼,
시간을 줍듯,
그렇게 바늘을 움직여 간다.
잘벼린 칼처럼,
휘익,
방공기를 가르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노파는 이불자락을 무릎 위로 더끌어 올린다.
사이.
노파-(대뜸 고함치듯) 갸 오나 한번 내다 보아!
여인-(대꾸없이 바느질만 계속 한다.)
노파-(여인에게로 미운 눈길을 한번 주며) 젊은 게 정 없긴.
사이.
여인-(가끔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간 불현듯 다시 열중한다.)
노파-(느닷없는 큰 소리로) 아, 갸오나 한번 나가 보아!
여인-(손한번 멈추지 않고 못들은체)
노파-어이그, 젊은 게 정없긴.
(다시 화를 누르고 염주를 세는일에 열중한다.)
그렇게 한참 동안의 시간.
흉흉한 바람소리를 끊으며,
문밖에서 투덕투덕 들리는 발짝 소리.
여인이 놀란 얼굴을 드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두툼한 모자를 쓴 한 사내, 들어온다.
여인-(거의 질려서) 누, 누구셔요?
노파-(아이처럼 기쁜 낯빛) 늦었다.
해지기 전에 오지 않구서. (여인쪽을 매섭게 노려보며) 내 뭐랬냐? 마당에 불이라도 하나 겨놓지 않고.
사내-(오히려 의아해하며) 누구…시요들?
여인-(짐짓 목을 곧추 세우며) 아마 밤길에 집을 잘못 찾으셨나본데 어느 댁을 찾으시는지요?
노파-그저 겨울에 너무 얼면 봄에 살이 안붙는 법이야. 옷은 탄탄히 입었냐? 모자는 뜨뜻하겠다만서도.
사내-(여인의 눈을 정시하며) 이십여년을 살아 온 집인데 잘못 찾을 리가 있겠읍니까? 폭설로 길이 형체도없어지긴 했지만 눈감고도 찾을수있지요.
노파-(고함치듯)어서 저녁밥 가져와. 애기 시장하겠다. (피리소리처럼 끈끈하게) 내 강아지, 이리 온. 어서 발 좀 녹이래두. (다시 느닷없는 큰소리로) 아, 어서 밥 가져와!
사내-(엉겁결에) 저녁은 먹었어요.
노파-(아이를 달래듯, 곡조를 붙여) 뭐라고? 먹었다고?
여인-(안타깝게) 어머니, 아니에요.
노파-(고함치듯) 뭐든 좀 가져와. 밤이든 감이든.
사내-우선 앉으시오.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차차 생각하기로 하지요.(아랫목으로 성큼섬즘 걸어가 덜썩 주저 앉는다.)
여인-(흠칫 놀라 문쪽으로 뒷걸음친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노파-(사내의 손을 잡아 정겹게 어루만진다.) 그저 계집이나 사내나 손발이 따수어야 새끼가 금방 생기는 법이야. 계집이란 게 손이나 마음씀이나 얼음장 한가지니 원! (느닷없는 큰소리로) 아, 어서 뭘좀 가져 와. 그저 숨겨놓고 저나먹을 줄 알지.
여인-(무어라 말하려다 노파의 성화에 할 수 없다는 듯 문을 열고 나간다.)
노파-(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내 뭐랬어. 떠돌이 계집은 데려오는 게아니야. 늘 저 혼자만 처먹지.
밤이랑,
감이랑.
아이구 내 새끼.
오늘은 뭘하며 놀았누.
눈이 이렇게 오시는데.
사내-할머니, 며느님이세요?
노파-저년은 내 귀가 먹은 줄 알지. 그저 쏙닥쏙닥 내 흉만 본다니까 난 입만 보면 다 알지.
여인-(감이 든 소쿠리를 들고 들어온다. 말없이 사내 앞으로 밀어준다.)
사이.
여인 무어라 말하려 하나,
사내-(가로 막으며) 여태껏 빈 집을 이리도 따뜻하고 깨끗하게 지켜준 건 고마운 일이오. 나는 오랫동안 이런 따뜻한 곳에서 떠나있었소. (여인에게) 이쪽으로 내려앉으시오. 날씨가 차오.
여인-혹 전쟁통에 잃어버렸다는 그이의 형님이 아닌가요?
사내-내 기억 슥에서 나는 늘 혼자였소.
여인- (단호하게) 그렇다면 잘못 아신 거에요. 저희 어머님은 여기서 수십년 동안을 살아 오신걸요. 그렇죠, 어머니?
노파-(계속 감을 먹는다. ) 그저 숨겨놓고 혼자만 먹는다니까.
여인-(타이르듯) 어머니, 고만 잡수세요. 또 뒷간 가서 울려고 그러세요. (노인의 귀에 대고 크게) 어머니! 언제부터 여기서 사셨나 얘기 좀 해보세요.
노파-(만족하게 웃는다. ) 흐흐흐! 늘 이렇게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내-그런 건 상관없는 일이요. 어차피. 나도 딸린 식구가 없으니 두분을 여기서 묵게 해 드립니다.
여인-정말 답답한 일이에요. 동네사람을 불러 오겠어요.
사내-(가만히 손짓으로 만류한다.) 폭설이오. 철로까지 못가서 눈 속에서 얼어죽을 것이오.
여인-정말…미치겠군요.
사내-산곡 역에서 내려 마을 쪽으로 가지 않고 밤나무 숲 쪽으로 올라가는 중턱. 뒤뜰엔 큰 감나무가 두그루. 옛날엔 여우 울음이 자주 들렸었는데. 밤을 따러 동네 아이들이 몰러오는 가을 외엔 너무도 적적한 곳이었소. 그나마 겨울엔 늘 눈으로 길이 끊겨버렸지.
고향이란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아서 좋은 건가. 그래 뒤뜰의 감나무는 여전하오? 가만 있자. 올해는 해걸이를 했을 거요.
여인-(아이 같은 표정으로)이 감인 걸요. 알이 굵어요. 올해는 해걸이를 했죠. 매일 못드리니까 어머닌 저렇게 성화세요.
사이.
(노파가 하나 남은 연시를 마저집어 먹는다.)
여인-(난감한 얼굴) 아! 정말 모를 일이군요.
노파-(꼭지만 담긴 소쿠리를 들고 일어서며) 이것 버리고 난 부엌에서 잘란다. 그저 아궁이 뒤가 제일 뜨끈해. (목소리를 낮추어) 그저 이번 겨울을 넘기지 말고 새끼가 하나 생겨야지. 새끼가 있어야 사내나 계집이나 꿀통 본 곰새끼처럼 집으로만 엉겨드는 거야.
여인-어머니, 여기 계셔요. 어머니!
노파-(여인을 흘겨보며 부엌으로 나간다.) 올 겨울 넘기지 말고 새끼하나 만들어야지.
여인-(손으로 무릎을 싸안고 동그랗게 앉는다. 긴 한숨) 후유 .
사이.
침묵 사이를 비집고 드는 길게 이는 기적소리.
사내-(문득 생각난 듯) 바깥양반께서도 곧 돌아오시겠지요?
여인-(흠칫 놀라) 그, 글쎄요. 아마 다음 기차로…. (일어서며) 어머니랑 부엌에서 자겠어요. 내일 다시 얘기하기로 해요.
사내-아니오.바깥양반이 돌아오실때까지 여기 앉아 있어요. 날씨가 차오. 여자.몸엔 추위가 독과도 같은것.
여인-(뭔가 말하러다가 그냥 앉는다. 초조한 빛.)
사내-당연히 비어있을 줄 알았소. 바깥어른은 뭘하는 분이시오. 늦게사 돌아오시나 본데.
여인- (고개를 갸우뚬하며) 여기 사 셨다는건 참 믿을 수 없어요.제가 여기서 살기 시작한 건 6년밖에 안됐지만 그이는 여기서 태어났다고 얘길 했었거든요.
사내-그렇소. 나는 여기서 태어났소.
지금도 여기 사는지 모르지만 상구와 칠성이는 가장 친한 친구였소. 지금은 뭣들 하는지.
여인-상구씨는 벌써 애가 둘이에요. 칠성씨는 여태 혼자구요. 너무 살림이 없으니 올려는 처녀가 없대요.
사내-(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먼곳을 바라보는 눈길) 때로는 가난만이 연약하고 허한 가슴들을 서로 가까와지게 해주곤 했오. 변변히 잘먹는 것 없이 우리를 이렇게 탄탄하게 해 준 것도 가난이었소. 내일 아침엔 그 친구들이나 만나볼까.
사이.
기적소리.
기차의 덜커덕거리는 소리.
사내-요새 밤나무는 누가 관리하오?
여인-관리라고 할것도 없고, 그저 제가 조금씩 거름도 주고 약도 치고 그러지요. 가을엔 동네꼬마 녀석들이 절반 넘게 주워가버리는 걸요.
사내-(문득 여인을 노려보듯) 바깥어른께서는 꽤 늦으시는군요. 남자에게도 오늘같은 눈은 이기기 힘든 것인데.
여인-(외간남자와 스스럼없이 얘기한 자신을 문득 깨닫고 짐짓 표정을 굳히며)
아마
오늘은,
눈때문에……
사내-(끄덕이며) 폭설이더군요.
여인-(싸늘한 표정.) 반짇고리를 잡아당겨 바느질감을 주워든다.
그저 시간을 주워올리듯,
날숨에 맞추듯,
느리게,
습관처럼 바늘을 움직인다.)
사내-(반짇고리 안에서 말린 들꽃 한묶음을 짐어든다. 아이같은 웃음.) 이건 뭐지요?
여인-(바느질을 계속하며) 들꽃이에요. 맑은 바람이 부는 가을날, 여러가지 들꽃들을 꺾어다 처마 밑에 거꾸로 매달아두면 색깔이 죄 머리목으로만 쏠려 띠를 두른 듯 곱게 되지요.
사내-이건 들국화고, 이건 뭐지요?
여인-저도 어릴 때부터 예서 산게 아니라 이름들은 채 몰라요. 그저 색이 하도 고와서.
사내-결혼하시기 전엔 도회서 자랐군요?
여인-(꿈꾸는 듯 가만 웃으며) 조그마한 읍이었지요.
사내-바깥양반이 이렇게 늦게 들어 오시는 날은 무섭지 않소? 할머니도 반정신은 놓으신 것 같은데.
여인-웬걸요.(창쪽을 문득 바라본다.)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가위에 눌리기도 하는 걸요. 어머님도 애들처럼 무서움을 얼마나 타시는지 밤이면 제 무릎근처를 떠나지 않아요.
사이.
(바람소리 흉흉하다.)
이렇게 해가 빨리 져버리는 곳은 또 처음이에요. 늦은 점심을 먹고나면 어둠은 뒷산 언저리와 밤나무숲과 잡풀더미, 관목 숲을 먹어들어와요. 바람은 영락없는 발짝 소리를 내기도 하죠.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친다.)
사내-주인께선 자주 집을 비우는 모양이오?
여인-아,아니에요.
오늘은,
유별나시네.
사내-(오래도록 여인을 바라본다.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서 장을 열며 혼잣말처럼) 진눈깨비로군. (방안을 서성인다. 갇힌 짐승같은 몸짓.) 정말 오랜만이야. 이런 따뜻한 방은.
(사내, 편안한 하품을 한다.)
(다시 기적소리 울리며, 덜컹하고 기차가 정차하는 소리.)
사내-(허리를 굽혀 여인의 눈을 들여다 보며) 아마 주인께서는 저차로 돌아 올게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설마 이런 산속에 혼자 주무시게야…….
여인-(싸늘하게) 여기서 주무세요.
저는 부엌에 가서 자겠어요. 부뚜막은 방보다 더 따뜻해요. (바느질감을 챙겨 넣는다.)
사내-내 생각엔 아무래도 저 기차 로 주인이 돌아올 것 같소. 그때까지 얘기나 하며 기다리지요.
여인-(빤히 사내를 올려다 본다.) 눈이 오면
아마
못 올지도 몰라요.
그럴 거에요.
폭설이라…….
(사이, 기차가 다시 덜컹하고 움직이는 소리.)
당신은 옛날 이 집을 떠나고 난후 어디를 그리 오래 다녔는지요. 남자들이 때로 그들의 까닭 없는 바람의 습성 때문에 얼마나 타인을 아프게 하는지, 아마 자신들은 모를 거예요. 당신에겐 가족도 없었나요?
사내-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내 지난 얘기를 들러주고 싶소.
여인-바느질을 하면서 들어도 괜찮을까요?
사내-오히려 편하오. (창가에 기대어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바라본다. 천천히, 느린 곡조의 노래를 부르듯) 때때로 사내들은 혈혈단신으로, 주머니 속엔 가진 것 하나 없이낯 선 도시에 도착하는 수가 있다오. 낯선 곳에선 내리는 눈조차 낯선 법이지.
여인-마치 그이처럼.
사내-(못들은 듯) 그때의 내겐 그 빈손이나 홀몸이 오래 입은 옷처럼 편하기만 했오. (다시 둥글게 서성이기 시작한다.) 초라한대로 내삶을 새로이 시작하겠다는 내밀한꿈으로 가슴이 다 두근거릴 지경이었오.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당신은 그래도 고등학교를 두어해정도 다닌 사람처럼 보이는군. 그것도 이런 시골구석에서가 아니라. 아! 신경쓸 거 없어요. 다만 나도 그만한 정도의 학교물을 먹었단 얘기지.
사이.
짐승의 울음소리.
바람의 틈을 비집고 날아든다. 저 소리도 여전하군.
여인-진저리가 나요. 문을 열면 온통 사방에서 번쩍이는 짐승의 눈들로 감시 받는 기분이에요. 그건 끔찍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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