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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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중공 대학생들의 시위는 해가 바뀌었는데도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더구나 5일 북경대 구내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북경일보는 물론 당기관지 인민일보를 수백부 불태워버렸다고 외신은 전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의 민주화 시위를 소수의 오도로 이뤄진것처렴 왜곡·편파보도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편파보도는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볼셰비키혁명 직건 「레닌」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신문은 집단적 선전자및 집단적 선동자일뿐 아니라 또한 집단적 조직자이기도 하다』
그가 1912년「노동자의 신문」을 표방하며 창간한 프라우다를 혁명 후에는 대중조작및 여론 통제수단으로 사용한 것도 바로 이같은 신문관에 기인한다.
「스탈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언론 통제의 고삐를 늦추거나 놓아버리는 일은 매스 미디어를 대중의 「고민이나 생각의 단순한 기록」을 반영하는 「거울」로 되게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빚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프라우다에 진실이 없고, 이즈베스티야에 뉴스가 없다』는 조크까지 나돌 정도다. 러시아어로 프라우다는「진실」이즈베스티야는 「뉴스」라는 뜻이다. 모택동도 「레닌」이나 「스탈린」못지않게 신문의 역할과 위력을 잘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 기능과 영향력을 철저히 이용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제호를 쓴 인민일보가 문혁때 실권파의 수중에 들어가버리자 이를 되찾기 위해「대자보」라는 벽신문을 비상수단으로 동원한 것도 바로 모택동자신이었다.
대자보란 글자 그대로 「큰 붓글씨로 된 신문」. 중공에만 있는 특유한 언론 매체다.
중국에서는 17세기부터 이런 종류의 홍보수단이 있었다고 하지만 본격적인 매스컴의 한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연안시대부터다.
매체야 어떻든 모택동의 신문에 대한 인식은「스탈린」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즉 첫번째는 조직이며, 두번째는 고무·선동, 세번째 가서야 비판 기능을 인정했다. 따라서 어떤 목적을 수행하기위한 편파보도가 신문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모택동의 사망과 함께 최근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중공은 신문 편집·제작에도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인민일보를 비롯한 모든신문에 모의 어록만 고딕체로 인쇄하는등 특별취급하던 것을 모두 중단해버렸다.
신문은 대중의 것이지 결코 특정정권이나 인물의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 좋은 본보기다.
북경의 대학생들이 신문을 불태운 것도 결국 그때문이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언로를 트는일이 어떤 민주화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대는 이처럼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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