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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환우들의 46년 친구 봉두완 “내가 더 행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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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는 36명의 한센인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 있다. 천주교의 대표적인 한센병 환자 시설인 성라자로 마을이다. 입구를 지나 100m쯤 언덕을 오르자 작은 성당이 나타났다. 한창 미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장발의 남성이 눈에 띄었다. 1970년대 ‘동양방송’(TBC) 앵커로 활약한 봉두완(81)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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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봉두완씨가 경기 의왕시 성라자로 마을을 찾았다. 왼쪽부터 봉씨, 박현배 원장 신부, 마을 주민들, 최 라자로 수녀. 오른쪽 뒤로는 봉씨와 한센인의 인연을 맺어준 고 이경재 신부의 흉상이 있다. [사진 김춘식 기자]

“이곳이 나한텐 논산훈련소나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내가 사람이 다시 됐으니까요.” 팔순의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고, 특유의 유머감각도 여전했다. 그가 성라자로 마을과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46년째다. 초대 마을 원장을 지낸 고(故) 이경재 신부의 권유로 1971년 후원단체인 라자로돕기회 창립 멤버로 참여한 게 계기가 됐다.

71년 라자로돕기회 창립 멤버로 인연
의왕 성라자로 마을 거의 매주 찾아
홍라희 관장도 37년째 숨은 선행
남편 이건희 회장 생일 때마다 봉사

“당시만 해도 한센병의 원인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원장 신부님조차 2m 밖에서 대화하라고 주의를 줄 정도였어요. 가족들도 호적에 빨간 줄 그어놓고 죽은 사람처럼 취급했죠.”

봉씨는 4대·7대 라자로돕기회장을 맡으면서 마을 후원을 위한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또 주말마다 마을을 찾아 한센인들의 생일과 장례식 등 각종 경조사를 챙겼다. 지난해에는 100세를 맞은 한센인의 생일잔치를 열어주기도 했다. 마을가족 대표인 천철희(78)씨는 “이제는 (봉씨와)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고 했다.

봉씨에게 이곳을 계속 찾아 온 이유를 묻자 “여기에선 내가 행복하다는 게 증명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88년 총선에서 떨어지고 제일 먼저 이곳에 왔어요. 그랬더니 이곳 주민들이 ‘앞으론 더 자주 볼 수 있겠다’며 오히려 좋아하더라고요. 이곳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한센인들을 보면 국회의원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죠.”

그동안 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한센병 발생률이 떨어지면서 한때 300명이 넘던 환자들은 현재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후원의 손길도 뚝 끊겼다. 박현배 원장 신부는 “한때 후원자가 2만4000명에 달했지만, 요즘은 3000명도 채 안 된다”며 “전적으로 후원금에 의존하다 보니 환자들을 돌보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봉씨는 “요즘엔 돈 있는 사람들이 기부에 더 인색하다”며 한 숨은 후원자의 얘길 소개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리움관장이 37년째 매년 성라자로 마을을 조용히 찾는다는 것이다. “이 회장의 생일인 1월 9일만 되면 찾아와 조용히 봉사를 하고 갔어요. 한번은 누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봉사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한센인들이 남편을 위해서 기도해주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성라자로 마을 측은 다음달 5일 열리는 ‘제46회 라자로의 날’ 행사에서 봉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봉씨는 “100살까지 이곳에서 봉사하다가 한센인들 곁에서 죽는 게 마지막 남은 꿈”이라고 말했다.

글=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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