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탄핵 위기 때, 부통령·의회가 국정공백 메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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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왼쪽 사진)은 1972년 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발각되자 사임했다. 제럴드 포드 부통령(왼쪽 아래)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오른쪽 사진)은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으로 99년 탄핵 재판을 받았으나 탄핵이 부결돼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부통령 앨 고어(오른쪽 아래)가 국정공백을 메웠다. [중앙포토]

미국은 현직 대통령이 사임에 몰리거나 직접 특별검찰관의 조사를 받는 위기 상황이 수차례 있었다.

미국 대통령 위기 땐 어떻게
당시 부통령 앨 고어가 큰 역할
고성장 이끌며 지지율 50%대 얻어
상원은 이라크 공습 등 외교 관리
미 헌법상 대통령 유고 상황 땐
부통령·하원의장·국무장관 순 승계

가장 대표적인 게 ‘워터게이트 사건’의 리처드 닉슨과 ‘르윈스키 스캔들’에 연루된 빌 클린턴 대통령이다.

워터게이트는 1972년 6월 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던 비밀공작반 5명이 워싱턴의 민주당 전국위원회(워터게이트빌딩 6층)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사건.

닉슨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73년 5월 아치볼드 콕스가 특별검사로 임명돼 사건의 전모와 은폐 의혹을 규명했다. 이 과정에서 콕스는 백악관의 보복을 받아 파면됐지만 74년 7월 29일 하원 법사위원회는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닉슨은 하원 본회의, 상원에서의 탄핵 재판을 앞두고 같은 해 8월 9일 은폐 공작을 시인하고 스스로 사임을 택했다. 사임 당일 바로 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아 국정 공백은 발생하지 않았다. 미 헌법에는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하원의장→국무장관→재무장관→국방장관→법무장관→내무장관 순으로 대통령 후계자가 되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98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이 불거진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 99년 상원에서 탄핵 재판까지 받은 경우다. 미 헌정 사상 현직 대통령이 탄핵 재판을 받은 건 1868년 앤드루 존슨 대통령 이후 131년 만이었다. 결국 상원 재판에서 정치적 타결에 의해 탄핵안이 부결되긴 했지만 96년 재선 이후 클린턴은 2년여 동안 줄곧 스캔들에 시달려야만 했다.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팀의 수사를 받으며 유전자 감식(DNA)을 받는 수모까지 당했다.

오랜 국정 공백의 위기에도 클린턴 정권이 동력을 유지하고 98년 중간선거 승리, 경제 고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크게 부통령의 존재와 의회의 역할이 자리 잡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과 러닝메이트로 국민의 투표에 의해 뽑힌 2인자 앨 고어 부통령이 정책 입안 등에서 클린턴의 공백을 메워줬다. ‘보조 역할’이 아닌 ‘국정 파트너’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잃지 않고 50%대의 지지율을 확보할 수 있었다. 대통령에 의해 임명돼 ‘얼굴마담’ 역할에 그치기 십상인 한국의 국무총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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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건 경희대 정외과(미국 정치 전공) 교수는 “미국은 대통령 하야나 탄핵의 경우만 다음 수순이 정해져 있지 대통령의 통치 능력이나 귄위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거국 내각이 거론되거나 비상 매뉴얼이 작동하지는 않는다”며 “미국이 대통령제이긴 하지만 대통령의 국정 능력이 저하되더라도 의회가 중심을 잡고 국정을 쌍끌이해 나가는 시스템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게 위기 관리 능력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98년 이라크 공습이나 중동평화협상 등 외교적 사안의 경우에도 대통령이 설령 리더십 위기 상황에 있었지만 중량감 있는 중진 의원들이 버티고 있는 상원 외교위원회가 각종 청문회와 여론 형성을 이끌어나가며 위기 관리를 맡는 안전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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