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시국선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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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호 1 면

? VIP독자 여러분,안녕하십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이정민입니다.


? 무겁고 참담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양파 속껍질 벗기듯 하나씩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한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했던 말이죠.? 박 대통령과 40년 인연을 이어온 최순실은 국민이 대통령에게 잠시 위임해준 권력을 자신의 것인양 사유화하고 농락했습니다. 국민의 혈세인 나랏돈과 근로자의 피땀이 밴 기업의 돈을 쌈지돈 꺼내쓰듯 주물렀고, 국가기밀이 담긴 청와대 문건들을 사전에 보고받은 건 물론 자신의 입맛대로 내용을 고치고 심지어 구체적인 사업 지시까지 한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딸 정유라의 승마대회 성적 조작 논란을 조사한 결과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체부 관료들을 문책하고 급기야 강제로 사표를 받아 내쫓았습니다. ? 어떤 공적인 직함도 갖지 않은,민간인에 불과한 최씨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며 자기 멋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해온 겁니다.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다스려져야 하는 국가 운영이 어떻게 한 중년 여인의 손끝에서 이리 저리 휘둘렸던 것인지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들을 모독한 이같은 행태가 버젓이 '청와대'의 묵인 내지 비호하에 저질러졌다는데 국민들은 더 절망하고 있습니다. 절망은 이제 분노를 넘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운동으로 번질 태세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들불처럼 번지는 분노의 물결에도 당사자들은 '오불관언' 이란 점입니다. 박 대통령은 사건이 불거지자 어중간한 사과 발표문을 하나 내놓고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최씨가 연설문 작성등에 관여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좀 더 꼼꼼하게 챙겨 보고자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고 변명하면서 핵심을 비껴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내각 총사퇴 후→거국중립내각 구성' 요구에도 대통령은 부정적 입장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씨는 여전히 귀국하지 않은 채 언론 인터뷰를 자청해 '당장 귀국은 어렵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최순실 게이트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청와대 수석과 비서들 역시 일제히 혐의를 부인한 채 사퇴하지 않고 자리를 보전하고 있습니다. 일단 시간을 벌면서 버티면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아니면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걸까요? ?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는 어찌보면 '시국선언'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사용어사전을 들춰보니 "교수·재야인사 등 지식인이나 종교계 인사들이 정치ㆍ사회적인 나라의 시대 상황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자신들의 우려를 표명하며 해결하기를 촉구하는 것"이라고 풀이돼 있더군요. 시국선언은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지곤 했지요.1960년 4·19 직후 있은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전격 하야로 이어졌습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87년 6·10항쟁은 두 달전인 4월13일 전두환 정권의 직선제 개헌 거부 조치에 반발한 교수·대학생·종교인들의 시국선언이 도화선이 됐고,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 또다시 대학가가 술렁대고 있습니다. 서강대·이화여대·성균관대 등에서 시작된 교수와 학생들의 시국 선언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부산의 한 박람회 행사장엔 대학생들이 '대통령 하야' 플래카드를 들고 기습시위를 벌여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사건 발생 후 첫 주말을 맞는 내일(29일)은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대적인 집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카톡·페이스북등 SNS 상에 며칠 전부터 집회 참여를 약속하거나 다짐하는 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읽어서일까요.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오늘 오후 대통령을 만나 조속한 시국 수습책 마련을 건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똑부러진 답을 듣진 못한 것 같습니다.자칫 대통령의 숙고가 길어져 사태를 수습할 골든 타임을 놓쳐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 이번주 중앙SUNDAY는 최순실 게이트 정국을 수습할 해법을 모색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이명박 정부에서 역시 정책실장을 지낸 백용호 이화여대 교수,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경제 '과외교사' 역할을 했던 김광두 서강대 교수등 세 정권의 정책 브레인이 한데 모여 좌담을 갖고 현 시국수습 방안을 심도깊게 토론했습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통령이 기득권에 연연하지 말고 거국적인 중립내각을 구성하고,새 총리로 하여금 남은 1년 4개월의 임기동안 국정을 운영하도록 맡겨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박 대통령이 국민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더이상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이끌어가는게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행정공백이 생기면 정말로 무정부 상태의 위험에 빠질 수 있는만큼 대통령이 국회에 새 총리 후보 추천권을 줘 새 총리를 임명해 대통령의 행정 권한을 위임하는게 최선이라고 제안했습니다.? 대학 교수 출신인 이들은 현 한국 경제를 대단한 위기 국면으로 진단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 구성될 내각은 남은 임기동안 경제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해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다음 정부가 해야하는 사회적 의제의 큰 그림을 잘 그려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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