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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최태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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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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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대기자

최태민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 그림자는 박근혜 정권에 스며 있다. 최순실은 최태민 목사의 딸이다. 박 대통령과 최태민의 인연은 40년이다. 인연의 시작은 최 목사의 기발한 편지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에 대한 위로였다. 그는 퍼스트레이디 시절의 박 대통령 주변을 차지했다. 그의 죽음(1912~1994년) 뒤 공백은 최순실씨가 메웠다.

10·26 ‘박정희 추모식’에서
콘크리트 지지층의 허탈
“악령 같은 그림자, 최순실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위기에 빠뜨려”
최순실은 박지만 부부도 견제
그림자 속 사람·인연 결별해야

그 인연은 박근혜 권력의 기이한 이면이다. 인연은 가혹한 악연(惡緣)으로 끝나간다. 박 대통령은 악연의 늪에서 허덕인다. 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의 권위와 평판을 망가뜨렸다. 민심은 들끓는다. 박근혜 정권은 혼돈 상태다. 이런 모양의 급전직하(急轉直下)는 헌정사상 전례 없다. 며칠 전 박 대통령은 개헌을 외쳤다. 그때 보인 승부사의 기습 장면과 대비된다.

10·26 행사의 풍광도 바꿨다. 이날 서울현충원의 ‘박정희 대통령 37주기 추모식’은 지난해와 달랐다. 민족중흥회, 박사모 봉사단 회원들이 식장을 꾸렸다. 그들은 박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민심은 여기에도 투영됐다. 추모식의 일반 참석자는 1000여 명 수준. 지난해보다 반 이상 줄었다. 지지층의 집중도는 떨어졌다.

민족중흥회 회원 출신 김인주(74)씨는 “작년엔 추모 열기로 식장이 가득했는데, 올해는 최순실 사건 때문인지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았어”라고 했다. 그는 “박 대통령만큼은 측근 비리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는데 …악령(惡靈) 같은 최태민의 질긴 그림자가 최순실로 이어져 대통령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다. 그의 주름살 위로 허탈과 낙담이 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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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생리는 냉혹하다. 박 대통령은 대선 공로자들을 챙기지 않았다. 대선 때 앞장선 원로 7인회가 있었다. 원로들은 “고맙다”는 대통령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최순실만은 예외다. 왜 그럴까. 최태민 그림자가 박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것일까. 2007년 이명박-박근혜의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경선 때 ‘목사 최태민’은 쟁점이었다. 박근혜 예비후보는 “최 목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최태민의 삶은 혼란스럽다. 다섯 번의 결혼, 복잡한 사기 전력에다 목사·승려·경찰·교사를 지냈다. 그런 경력자의 특징은 능란한 처세와 권력 탐욕, 비술(秘術)이다. 최순실은 아버지의 그런 행태를 배웠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는 궁정(宮庭)이다. 궁정의 권력은 막후에서 작동한다. 소수의 궁정인들이 군림한다. 통치자는 그들에게 의존한다. 박 대통령은 문고리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에게 익숙하다. 최태민의 사위였던 정윤회씨는 세 비서관을 키웠다. 궁정의 실세는 비선이다. 비선 실세 최순실은 활개 친다. 국정은 말로 운영된다. 비선 실세는 대통령 언어부터 간섭한다. 궁정 밖 장관들은 들러리다. 대통령에게 장관의 대면보고는 대수롭지 않다. 소통은 중요하지 않다. 궁정의 통치자는 세상과 멀어진다. 비선 실세는 격리의 담장을 지킨다. 박 대통령과 외부 인사의 교류는 차단된다. 그것으로 대통령을 독점하는 비선의 권세는 단단해진다.

차단은 박 대통령의 동생들에게도 적용된다. 10·26 추모 현장에서 만난 유기정씨는 이런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는 70년대 후반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유씨는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이 박 대통령에게 박지만 부부를 음해했다는 거지요. 최는 박지만 부부가 청와대에 들어가지 못하게끔 방해했다는 겁니다. 그 재주 덕분에 최순실이 피보다 진한 물로 박 대통령에게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런 주장에 박지만 EG 회장도 동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순실의 행적에 대한 박지만의 분노 중에는 특이한 사안도 있다. 그것은 최씨가 육영수 여사의 유품과 폐물을 팔았다는 소문과 관련돼 있다.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에 전시된 육 여사의 의상은 한복과 원피스 정도다.

박지만·서향희 부부는 아들 넷을 두고 있다. 지난해 서향희 변호사의 쌍둥이 임신 소식이 김종필(JP) 전 총리에게 전달됐다. JP는 대견해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세상에서 이 얘기를 들으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박근혜 정권은 친인척 관리의 엄격함을 내세운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 탓에 그 철저함은 상처투성이다. 박 대통령이 쌍둥이 조카를 안고 있는 사진은 없다. 그것은 비정함으로 여론에 비치고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은 계속된다. 외교, 인사 개입 논란까지 번졌다. 대통령 하야와 탄핵 소리도 이어진다. 최순실의 존재는 박 대통령의 업보(業報)다. 최순실 게이트는 우회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고백해야 한다. 그걸 파헤치지 않고선 성난 민심은 가라앉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결단해야 한다. 최태민 그림자를 지워야 한다. 그림자 속 사람과 인연을 정리, 제거해야 한다. 그것 없이 국정 동력은 회복되지 않는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