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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맞은 암달러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달러 값이 떨어지고 오히려 원화 가치가 올라가면서(환율절상)암달러시장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고있다.
명동 남대문시장일대 골목곳곳에 두툼한 손가방을 끼고 하나씩 혹은 둘 셋씩 짝지어 나와있는 암달러상들은 요즘이 「과도기」라고 말한다.
지난 30년간 한길로 오르기만 하던 미국 달러 값이 주춤주춤 떨어지고 일본 엔값이 1년에 1만엔 당 5만7천여 원까지 2만원 이상 껑충 뛰어오른 탓으로 전같지 않은 장사형편을 두고 하는 말.
사실 달러골목 주변은 요즘 들어 더없이 한산해졌다.
다방입구를 서성거리거나 길모퉁이에 앉은뱅이 의자를 놓고 앉아 지나는 사람들 속에서 용케도 손님을 집어내는 달러상들의 눈빛은 여전하지만 『뭐』하는 물음에 『얼마』하고 되받아오는 손님을 맞기란 전처럼 쉽지 않은 모양.
되묻더라도 시세나 알고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푸념한다.
『거래가 돼야지. 1백달러 해야 2, 3백원 떨어지는데 요새 같아선 하루 1천 달러도 힘들어요』
코스모스백화점에서 구 중국대사관으로 빠지는 3백m 남짓한 사잇길, 명동달러골목의 어귀에서 25년째 달러를 바꿔왔다는 한 노파는 이렇게 장사 안 되긴 처음이라며 체념하듯 한마디. 좋던 때는『호떡집 불난 듯』올려댔다는 앉은뱅이 의자 밑에 깔고 앉은 전화통도 요즘엔 시세나 묻는 단골전화가 고작이라고.
요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쓰다 남은 것이나마 얼른 팔아치우려고 몇 백 달러 쥐고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 사는 쪽도 꼭 필요한 액수만 챙기는 바람에 거래가 크지 않다.
엔은 그나마 거래가 끊기다시피 했다. 시세급등으로「사자」는 쪽이나 「팔겠다」는 쪽이나 서로 관망세라 거래가 거의 없다는 것. 그외에 은행시세의 암시세가 거의 비슷해지면서 환전수요가 은행으로 몰려 종래 10이면 3은 되던 엔거래가 더욱 줄어들었다.
덕택에 한때 암달러 본거지로 얘기되던 명동달러골목의 하루거래량은 1백분의 1은 줄었을 거라고 노파는 어림짐작한다.
『이 장사도 그만둘 때가 됐나봐요』
종일 웅크리고 앉아 힘은 들었지만 다행히 공치지는 않았다면서 노파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자리를 챙긴다.
암달러상가가 시들해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원화평가절상요구가 공식으로 제기된 지난 7월 말. 작년 말께부터 엔의 급등으로 주춤하던 달러 값이 연일 1천원(1백달러기준)사이를 곤두박질했다.
대한민국 수립이래 계속된 환율인상과 높은 인플레 속에 갖고있으면 돈이 됐던 달러의 매력 때문에 줄곧 공정환율 이상으로 뒷거래 돼온 달러가 하루아침에 천대(?)를 받게 되리라고는 암달러상들 누구도 예상못했던 일.
72년 국제금괴밀수사건,83년 해외여행자 휴대품 규제강화 등으로 일시적으로 달러 값이 요동한 적은 있어도 본격적으로 달러값 자체가 떨어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달러장사란 한마디로 달러를 사고 파는 차액으로 이문을 내는 것. 그런데 달러가 계속 떨어질 전망이자 더러는 손해를 봐가며 「재고」처분 현상까지 생겨나고 있다.
달러값 하락으로 장롱 속에 감추어져 있던 달러가 은행창구로 몰리면서 특히 남대문명동 이태원상가 주변의 은행들은 자주 환전인파로 붐비기도 한다.
달러암시세는 24일 현재 사는 값이 1백달러짜리가 8만 8천 2백원, 부피나가는 20달러짜리로는 8만7천5백원선. 그러니까 은행의 현찰매도시세 8만8천1백원을 오히려 밑도는 수준이다. 거의 9만원까지 올랐던 지난7월말 시세에서 하락, 은행시세와 그날그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있는 상태.
공정시세 이상으로 실세화(?)돼있던 암시세의 매력은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그 차액의 일부를 취해온 달러상들의 장사도 덩달아 재미를 잃을 수 밖에 없다. 하루아침에 환율이 뛰어 앉아서 횡재할 일은 이제 바라볼 수 없게 됐고 거의 은행시세에 거래, 마진자체도 줄었다. 달러상들은 1백달러에 2만원대 하던 시절 5백원이상은 떨어지던 것이 요즘은 기껏해야 2, 3백원떼기라고 이구동성이다.
지난 82년 실명거래발표후 달러암시세가 하룻밤 사이 3,4천원 폭등하고 수만 달러씩 사달라며 고객들이 뭉치돈을 맡겼던 일은 달러상들에게 즐거운 추억거리가 되고 있을 뿐이다.
요즘도 「달러광」으로 통하는 화교들의 주기적인 매수세나 해외파견단 등 국제행사와 관련하여 일시적으로 약간의 활기를 찾기도 하지만 이제 암달러상도 기본적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스스로 진단한다.
국제수지혹자로 인한 달러관념의 변화와 원화가치의 상승, 그리고 은행창구 이용의 편리성, 호텔로비, 복덕방, 미장원에까지 퍼진 환전대행업소의 주변침투 등등 구조적으로 암달러수요는 줄게되어 있다.
명동달러골목, 한때 손쉽게 돈벌이를 즐겼던(?) 1백여명의 암달러상이 옹기종기 성업했던 그 골목에는 현재 20여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무면허외국환은행」역할을 하면서, 그러나 풀이 죽은 표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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