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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명 <제1장>|하늘과 대지(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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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광야에는 군데군데 물 덤불이 키가 넘도록 자라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으며 땅은 이제부터 말라붙기 시작하여 덕이의 말 갈기털 색깔처럼 검붉은 빛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하늘 위로 뿌연 흙 먼지가 날아 올랐다. 서북쪽 산들의 연봉은 푸른 빛으로 벌판 먼 곳에 떠있었다. 덕이는 말 고삐를 느슨히 쥐고 털가죽 안장 위에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광야에는 산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덕이는 낮선 땅으로 끝없이 나아갔으며, 이 길로 아버지 큰돌이나 외할아버지 덕이께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시험할 수련의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덕이는 앞모루 마을의 한부리 노인께서 가르쳐주던 밝족의 삶과, 옛말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온다는 자기네 종족의 역사를 머리속으로 되새기면서 이 무심하고 거친 광야를 둘러 보았다. 놀은 덕이의 뺨을 붉게 물들였고 말과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려 마른 딱 의에 휙 던져 질질 끌려 오도록 만든 것 같았다. 해가 기울자 뿌연 하늘의 바깥쪽은 어둑신해졌고 초저녁 별들이 몇 점씩 나타났다. 덕이는 터벅터벅 걸어가는 말 등에 앉아 흔들려 가면서 가까운 곳에서 길게 부르짖는 이리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밤새도 먼곳에서 서로 화답하듯 울기 시작했다. 덕이는 조상님들의 얼이 우렁우렁하는 목소리로 대지의 어둠속에서 떠올라 주위를 꽉 채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흰 자취의 구름처럼 조상님의 자태가 지평선의 끝에 나타나 열을 지어 흘러갔다. 광풍과 더불어 한 장수가 코에서 불기를 뿜는 말을 타고 짓쳐 왔다. 자오지라는 환웅족 지도자의 용맹함은 한부리 노인의 옛말에도 나왔지만 외삼촌 또래의 젊은 부족전사들 사이에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자오지를 다른 종족들은 치우라고 부른다 하였다. 그는 돌 보다 더 단단하고 가벼운 투구를 머리에 쓰고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뜻대로 다루는 재주를 가졌던 분이었다. 자오지는 강하고 날쌘 전사들이 모시는 조상님이었다. 그가 칼과창 그리고 큰 활과 큰 도끼 긴 창을 만들어서 초목과 날짐승 길짐승 벌레와 고기를 다스렸다고 했다. 자오지께서는 초목이 열려 제 자리를 잡고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가 깊은 산과 큰 못으로 가서 살게 하였다. 그는 모든 병기를 만드는 일과 적을 쳐서 나라를 지키는 소임을 맡았다. 다시 지평선 위로 소를 탄 한아비가 천천히 지나가는 듯 하였다. 그것은 고시였다. 고시님은 밝종족 환웅족의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을 맡으신 조상님이었다. 여러 부족들은 그때까지만 하여도 곡식을 심고 농사를 지어 수확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을 알지 못하여 백성들은 모두 나무 뿌리 열매 채소를 주워 먹고 물고기와 짐승의 날고기를 먹었다. 고시께서 농사 짓고 거두는 법을 가르치고 나서 깊은 산중에 들어가 계시더니, 마른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에 강풍이 불어와 가지와 가지가 서로 비비대어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불은 뜨겁고 무서웠지만 고시는 생각 끝에 돌과 돌로 서로 부딪쳐서 불씨를 만드는 법을 알아내어 음식도 익혀 먹고 추위도 견디게 되었다.
다시 지평선 위에 한부리 노인처럼 머리와 수염이 하얀 한아비가 천천히 지나갔다. 그것은 신지님의 모습이었다.
여러 부족들은 서로의 뜻을 알릴 글을 가지지 못하였는데 신지께서 하루는 사냥을 나가 사슴을 좇다가 그 발자국을 보고 뜻을 적어 전하는 방법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사슴이 뛰어간 발자국을 보고 사슴이 달아난 방향을 알게 되었으니 신지는 사람도 그렇게 자기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는 돌과 흙과 뼈 외에 긋고 파고 그려서 부족들이 서로의 의사를 남기도록 하였다. 다시 허공으로는 머리를 질끈 동이고 몸집이 펑퍼짐한 한어미가 웃으며 나타났다. 그는 주인이라는 조상님이었다. 옛적에는 남녀가 한 굴속에 섞여 살더니 서로 난잡하게 어울러 누가 누구의 자식이고 아비인지를 몰라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들이 어미를 받들어 살았다. 여자들은 일찌기 고시님에게서 농사를 배워 지켰고 그릇을 빚었으며 옷을 만들고 불씨를 지켰다. 그렇듯이 오랫동안 살더니 마을과 마을이 서로 싸우게 되고 농사 일은 점점 더 갈아야 할 땅이 많이 필요하게 되어 남자들은 어미에게서 떨어져 나와 다른 마을의 여자를 빼앗아 오기도 하고 마치 사슴이나 멧돼지를 사냥하여 오듯 둘셋씩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에 주인 한어미가 나타나 남녀의 결혼을 주관하시게 되었다.
덕이는 말 안장 위에서 잠깐 잠이 들었었다. 과하마는 주인을 등에 태우고 어두워 가는 광야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덕이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조상님들은 꿈 속에서 한부리 노인의 옛말처럼 그들 부족의 과거를 죽 펼쳐 보이시고 광야 저편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 대신에 어둠이 더욱 뚜렷해진 허공에는 저녁 별이 쏟아져 내릴듯이 덕이의 코 끝에서 반짝였다. 덕이는 말에서 내렸다. 그는 안장을 내려 잠자리를 만들고 주위에 흩어진 마른 나뭇가지들을 줍고 허리에 두른 주머니에서 마른 떡을 꺼냈다. 나뭇가지를 다듬어 길다란 송곳
을 만들고 바싹 마른 편편한 나무 조각을 가려내어 구멍에 마른 쑥을 넣고 손으로 한참동안 맞비볐다. 연기가 피어 올랐다. 덕이는 입술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숨을 솔솔 불어 주었다. 노오란 불꽃이 살았다. 불꽃은 곧 핥으면서 나뭇가지들 위로 기어올랐다. 이제 광야는 완전히 캄캄해졌고 오직 모닥불 한점만이 빛났다. 그것은 어둡고 거친 광야의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표식과도 같았다. 덕이는 마른 떡을 구워 먹고 털가죽에 누웠다. 저 남쪽 바다에는 많은 고을이 있고 또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면 같은 환융족의 부유하고 개명한 고장이 있다는데 덕이는 한부리가 말한 것처럼 열 손가락만큼 갈라진 모든 부족들의 땅을 모두가 보고 싶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덕이는 말과 함께 여행을 계속했다. 주위의 풍경은 여전히 변함없는 덤불 숲과 마른 황토의 광야였다. 차츰 서쪽의 높은 산들이 지평선 위로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숲이 보이기 시작했고 계곡과 강줄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은 마른 내에 지나지 않았고 가끔씩 수초에 덮인 물웅덩이가 여기 저기에 괴어 있었다. 강이 보이고 나서 사흘 째가 되던 날 저녁 때에 덕이는 바위밑의 움푹 팬 곳에 그날 밤의 잠자리를 정해 두고 사냥을 하러 나갔다. 그가 어깨에 멘 사슴 가죽 전통 속에는 옥석과 뼈로 만든 날카로운 촉이 달린 화살이 십여대나 꼽혀 있었고, 활은 손잡이가 버드나무나 노간주나무를 불에 달군 것이었으며 양쪽의 휘어지는 부분은 소뿔을 대고 사슴의 힘줄로 죄어 맨 것이었다. 덕이는 숲 근처로 가서 사방이 훤히 내다뵈는 바위 뒤에 숨어서 기다렸다. 토끼나 사슴이나 족제비 같은 작은 짐승들이 저녁 무렵에 물가로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덕이는 어렸을 때에 배운 그대로 입술을 여러 모양으로 비틀며 짐승의 소리를 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뭇잎이 흔들리고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덕이는 화살을 시위에 걸고 노리면서 바위 뒤에 착 붙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숲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노루의 머리가 보였다. 노루는 아직은 새끼를 면하지 못한 중치의 암컷이었는데 궁둥이 부분이 윤이 나고 살이 포동포동 올라 있었다. 노루는 몇발짝 걷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물가로 내려가기 전에 목을 빼어 사방을 경계했다. 덕이는 숨을 죽이고 짐승이 완전히 물가의 자갈 밭으로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노루는 다시 처음처럼 방심 상태로 돌아가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덕이는 무릎을 세우고 구부린 채로 활을 엇비슷이 숙이고 시위를 당겼다. 화살 끝에 노루의 옆구리가 크게 막아서고 있는 듯 했다. 덕이는 첫번째에 옆구리를 맞히고 노루가 주춤 했다가 기력을 되찾아 뛰기 전에 다시 두번째의 화살을 날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덕이는 화살 한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는 노루를 향하여 쏘았다. 노루가 펄쩍뛰어 오르는가 했는데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덕이는 의심할 사이도 없이 낱카로운 규석으로 갈아 만든 돌칼을 쥐고 달려갔다. 단칼에 노루의 멱통을 찔러 숨을 끊으려는 생각이었다. 덕이가 노루 쪽으로 뛰어 내려가는데 물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달러 나오면서 외쳤다.
손 대지마라. 그 노루는 내가잡은 거야.
덕이는 깜짝 놀라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상스런 차림을 한 사람이 서있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가죽 옷이 아닌 부드러운 천의 옷을 입었고 허리에 가죽띠를 찼으며 띠 위에는 동그랗게 반짝이는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는 덕이 보다 서너살 더 먹어 보였고 몸집이 다부져 보였다. 덕이는 화살을 쟀던 활을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쳐들었다. 싯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살이 날아와 덕이의 발앞에 꽂혔다.
움직이지 마라.
왜 그래, 쏘지 마.
하는 소리가 그 소년의 뒤에서 들리더니 보다 작은 아이가 숲을 나와 물가로 내려왔다.
그 아이는 덕이 또래로 보였는데 역시 머리에 두건을 쓰고 부드럽고 얇은 천의 옷을 입고 가죽띠와 장식을 달았고 같은 모양의 반짝이는 장식을 붙인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큰 아이는 덕이가 혼자 있음을 알고는 허리에서 칼을 빼어들고 성큼성큼 물을 건너왔다. 그 아이기 가진 칼은 덕이의 규석 칼처럼 투박하고 검은 돌칼이 아니었다. 그의 칼은 보다 날카롭고 가벼워 보였으며 끝이 뾰족하고 몸체는 둥글게 벌어졌다가 다시 가늘어 지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칼은 저녁 햇빛에 번쩍였다.
너는 어디 사람이냐?
나는 저쪽 큰 강에 산다. 갈래 마을에서 왔다.
갈래?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돌아보았다. 작은 아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응, 아마 강북쪽의 부족인 모양이군. 너는 어느 종족 사람이지?
덕이는 자꾸만 노루를 내려다 보며 대꾸했다.
나는 환웅족이라고 배웠어.어른들이 가르쳐 주었다. 우리끼리는 밝족이라구 한다구.
아이가 빙긋이 웃었다.
그래, 우리는 밝족이란다. 그리고 환웅께서 세우신 나라에 살고 있는 거야. 우리두 너와 같은 종족의 사람이야. 이봐, 짐승이 화살을 두 대 맞았어. 이젠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 이 노루를 나누어 먹는게 어떠냐?
덕이는 노루 머리에 깊숙이 박힌 다른 화살을 보고 쾌히 승낙했다.
좋아, 아주 큰 놈인데.
갑자기 몸집 큰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배야, 이 아이의 칼을 봐라. 이걸 가지고는 사냥은 커녕 풀도 베지 못하겠어.
한배라고 불린 작은 아이가 말했다.
너희들 부족은 아직 구리를 쓸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구리? 그게 뭔데. 우야, 네 칼좀 보여주렴. 우라고 불린 키 큰 아이가 허리에 찼던 동검을 다시 아까처럼 빼어 내밀었다. 동검은 덕이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물건이었다.
너희들 강남쪽에서 왔니?
그래 우리는 아리 강가 아래쪽에 산다.
나두 들었어. 그곳에는 사람들이 모두 풍족하게 살고 대처 고을이 여럿이라는 말을 들었어. 그런데 이리는 어떻게 만든거냐?
우가 동검을 다시 집어 널었다.
말하자면 아주 복잡하단다. 돌을 구워내면 돌이 물처럼 녹는단다. 무엇이나 만들지.
그는 노루를 짊어지기 전에 머리에 박혔던 화살을 뽑았다. 그는 한참이나 용을 쓰며 비틀고 돌리더니 뽑아낸 화살을 내밀었다.
이건 네가 가져라. 우리 화살로는 단 한대에 곰도 잡는다.
그들의 화살촉도 덕이네 갈래마을에서 쓰는 옥석촉이나 뼈촉이 아니라 구리라는 물건으로 만든 것이었다. 끝이 뾰족하고 양쪽 옆의 날개가 날카롭게 곤두서있어서 한번 박히면 좀처럼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덕이가 우라는 큰 아이에게 말했다.
내가 홀륭한 잠자리를 봐두었다. 그리루 가자.
소년들은 같이 바위 밑의 아늑한 처마 아래로 찾아갔다. 한배는 말을 데리고 돌아왔다. 말의 안장도 광택나는 가죽이었는데 구리 장식이 달려 있었다. 덕이는 나무를 모아왔고 우가 노루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꺼내어 숲속의 작은 짐승들에게 던져 주고나서 모닥불 위에 나무말뚝을 세우고 사슴을 꿰어 걸어 두었다. 사방은 어두워졌고 따뜻한 불가에서 고기 익는 냄새가 났고, 세 소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배는 이마가 훤칠하고 총명한 눈이 크게 빛나고 웃을때에는 이가 환하게 드러나는 인상이 아주 좋은 아이였다. 그리고 우는 어깨가 단단해 보이고 몸집은 크고 힘이 있어 보였고 광대뼈가 솟고 눈이 길고 가늘게 찢어진 억센 인상이었다. 덕이는 살결이 가무잡잡하고 몸이 날렵하게 보였으며 좀 수줍음을 타는 아이였다.
네 이름은 뭐냐?
덕이라구 한다.
한배는 다시 되뇌어 보았다.
덕이? 참 좋은 이름이다. 우리 집안에도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데 너는 여기 뭣하러 온거냐?
덕이는 우물쭈물 하다가 말했다.
응, 어른이 되려고 혼자 나왔다. 돌아가서 안해를 얻어야 하거든.
그래 너희 부족에서는 그런 관습이 있었구나. 우리두 그렇지만 아내를 얻으려고 짐을 떠나는게 아니라 젊은 천사가 되기 위해 철 따라 집을 떠나지. 우린 일행들이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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