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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서답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엊그제 문교부 장관과 서울시내 대학 총장들이 마주 앉아 주고받은 얘기는 우리 나라 대학의 문제와 고민을 하나의 단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문교부 장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앞으로 과격 시위와 농성으로 대학이 기능을 잃게되면 대학의 총·학장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자체 수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감독권을 행사해 휴업 또는 휴교령을 내리겠다, 이런 요지의 강경 지시 였다.
총·학장들의 반응은 동문 서답 같지만 그 나름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운동권 일부 학생들의 좌경화는 교육적 차원을 넘어섰으며 대학의 힘만으로는 이들을 선도하기 어렵다. 이제 누구의 말꼬리를 잡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오늘의 학원사태는 누구의 책임이라는 말인가.
문교부는 말로만 대학의 자율화를 얘기하고, 실제로 대학에 자율다운 자율을 주어본 적이 있는가.
대학은 대학대로 문교부가 자율권을 준다고 했을 때 팔 걷고 나서서 작은 자율이나마 소중하게 행사하고 지키는 노력을 제대로 했었는가.
요즘 대학이 풍지 박산이 날 지경으로 난리를 치르는 중에도 어느 교수 하나 선뜻 나서서 학생을 설득하거나 데모를 뜯어 말리는 광경을 보수 없었다. 겨우 보직 교수만 나서서 우왕좌왕 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법석을 부린 건국대의 경우다.
현장에 뛰어들어 학생과 담판은 못할 망정 신문지상이나 매스컴을 통해 바른 얘기하려는 학자들 조차도 없는 것 같다.
결국 책임있는 행정 당국도, 대학도 모두 딴데만 보고 손가락질을 할뿐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부형의 입장도 그렇다. 문교부가 교육의 책임을 지지 못하고, 대학교가 「교육적 차원을 벗어났다」고 말하면 오늘의 대학문제는 학부형이 떠맡으라는 말인가.
학부형이 무슨 수로 이념의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고, 민주 정치가 뭐고, 정의가 뭔가를 교육한다는 말인가. 어렴사리 비싼 등록금을 마련해 아들, 딸들을 대학에 보내며 그래도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은 나라의 훌륭한 교육 정책에 따라 대학들이 좋은 학문과 덕목들을 가르쳐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소망은 아랑곳 없이 문교당국은 대학에, 대학은 또 학부형과 사회단체에 그 모든 책임을 미루면 정작 대학생이 설 자리는 어디며, 학부형은 어디를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언필칭 국사를 꾸러 간다는 정치인들까지도 여는 야를, 야는 여만을 탓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시비곡직을 가리기에 앞서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과 짜임새와 절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정치인들이 오늘의 정치 문제를 정말 국민의 일로 알고 다루었다면, 문교당국이 진작 대학을 대학답게 대접하고 존중했다면, 그리고 대학은 대학대로 스스로의 문제를 대학다운 권위와 신념으로 대처했다면 이처럼 난감한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그 너무도 당연한 가정들을 현실의 일로 받아들이고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문제는 훨씬 수월하게 풀러갈 것이다. 불가능의 가정이 아니라 가능의 가정들인 것이다.
그 명약관화한 사실들을 놓아두고 모든 책임을 「브루투스」에게만 돌리는 한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끝도 없는 악순환의 연속일 뿐이다.
이 중대한 시국을 남의 일로만 돌리는 문교 당국이나 대학 총장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엔 개탄과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모두가 「제자리 찾기」「자기몫 다하기」운동을 벌여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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