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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 마카오 간 틈에…시진핑 “국유기업 당 통제 강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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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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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마카오에 있는 세인트폴 성당 유적을 방문한 리커창 중국 총리(가운데). [마카오 신화=뉴시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1일 ‘국유기업 당 건설 업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중요한 연설을 했다는 내용을 12일자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시 주석은 국유기업 경영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국유기업은 당 중앙의 의사를 관철·집행하는 중요 역량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유기업 경영자들에게 정치의식과 대국의식, 핵심의식, 간제(看齊·일치·정렬이란 뜻)의식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시 주석이 연초부터 당·정 관료나 군 간부들에게 당 중앙에 대한 절대 충성을 강조하며 사용해 온 용어로 국유기업 경영자들에게도 확대시킨 것이다.

시 주석, 경영진 불러 정치의식 주문
사회주의 근간 흔드는 민영화 반대
리 총리는 시장원리로 통폐합 주장
연초부터 경기부양 방법론 등 충돌
인민일보도 리 총리 정책 강력 비판

이 보도의 행간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깔려 있다. 이날 회의에는 류윈산(劉雲山)·왕치산(王岐山)·장가오리(張高麗) 상무위원 등이 배석했다. 하지만 당연히 참석했어야 할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빠졌다. 그는 이날 마카오를 방문 중이었다. 문흥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장은 “회의 날짜 택일이 하필이면 리 총리가 부재 중인 날을 골라 이뤄진 게 단순한 우연은 아닌 듯하다”고 말했다.

당의 책임자인 시 주석과 정부(국무원) 책임자인 리 총리는 최근 중국 경제의 최대 과제 중 하나인 국유기업 개혁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충돌했다. 리 총리는 시장 원리를 한층 더 도입해 국유기업을 개혁하고 당·정부의 보호 아래 비대해진 몸집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시 주석은 개혁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시장 원리보다는 공산당의 지도를 강조하고 과감한 퇴출이나 국유자산의 민영화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베이징의 한 관측통은 “시 주석은 사회주의 체제의 근간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신념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지난 7월 4일 공산당과 국무원이 공동으로 개최한 ‘전국 국유기업 좌담회’에서 서로 상충된 발언을 했다. 시 주석은 “국유 기업은 더 강하고 우량하며 커져야 한다. 공산당의 영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리 총리는 “시장 규율에 따른 국유 기업의 슬림화가 필요하다”고 발언했다. 나흘 뒤 시 주석은 리 총리를 배제한 채 자신의 경제 측근들을 모아 놓고 ‘경제정세 좌담회’를 개최했다. 리 총리는 전문가들을 모아 별도의 경제정세 좌담회를 열었다. 베이징 관측통은 “시 주석이 리 총리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국유기업 책임자들에게 당의 통제를 강조한 것은 국유기업 개혁을 둘러싼 노선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과 리 총리는 올 상반기부터 국유기업뿐 아니라 경제 운용 전반을 놓고 노선 대립을 빚었다. 리 총리가 이끄는 국무원은 재정·금융의 경기 부양을 통한 중국 경제의 안정 성장을 중시한다. 반면 시 주석은 경기 부양이라는 수요 측면이 아니라 과잉 생산 해소 등 공급 측(서플라이 사이드) 개혁을 통해 중국 경제의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올 5월 인민일보 1면에는 ‘권위 인사’라는 익명의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리 총리와 국무원의 경제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앞으로 2년간은 (리 총리가 주장하는) V자나 U자형 성장이 아니라 L자형 행보를 계속할 것”이라며 “공급 측 개혁만이 중국 경제의 나갈 길”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베이징에선 시 주석의 경제 브레인인 류허(劉鶴)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이 ‘권위 인사’란 이름으로 리 총리의 정책을 공개 비판한 것이란 해석이 퍼졌다. 당시 한 외교관은 “중난하이(中南海)의 남북 대립이 극에 달했다”고 표현했다. 중국 공산당의 핵심 기관은 중난하이의 북쪽에, 국무원 주요 기구는 중난하이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나온 말이었다.

중국에선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가 당과 군·정무를 관장하고 경제 운용은 국무원 총리가 관장하는 전통이 존재해 왔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주룽지(朱?基) 총리 시절이나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시절에는 이런 분업이 잘 이뤄졌다. 하지만 시 주석은 집권 초반부터 경제 운용에 대한 권한까지 업무 영역을 넓혀 왔다. 그는 자신이 조장을 겸하는 중앙재경영도소조를 통해 경제 영역을 장악하고 과거에는 총리가 주재하던 경제공작회의도 직접 챙기고 있다. 그러는 사이 리 총리의 영역은 급격히 축소됐고 급기야는 내년 가을 예정된 제19차 공산당 대회에서 총리직을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베이징=예영준·신경진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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