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제금융시장서 느긋해졌다|워싱턴 IMF 연차총회 취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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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처지가 바뀐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게 한 모임이었다.
「억지」 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요구를 들고 나와야하는 미국이나 상대적으로 강해진 경제력을 배경으로 강경한 대항 자세를 취하고 나선 서독·일본이나, 또는 세계경제의 표류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묻는 제3세계의 높아진 목청 등이다 예전 같지 않았다.
더우기 요즘 3저의 물결을 타고 국제수지 흑자를 내고 있는 우리측의 입장변화는 더욱 두드러졌다.
가장 큰 이슈의 하나이던「돈 빌기」의 필요성이 사그라 든 탓인지 우리 주최의 리셉션이 한번도 없었는가하면 외국대표들의 면담 요청 쇄도등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표단의 한사람은『만나봐야 우리가 손해볼 부탁이나 해올텐데 피하는 게 상책.』 이라는 진반농반의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과연 이게 옳은 것인지는 차지하고 예전에 볼 수없이 여유와 의연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는 느낌을 갖게끔 했다.
지난 9월30일부터 4일간 미 워싱턴에서 열린 세41차 IMF (국제통화기금)· IBRD (세계은행) 연차 총회를 관류한 분위기는 미국의 엄청난 무역 적자와 멕시코를 비롯한 산유 외채 국의 부도위기라는 2개의 대형 악재를 축으로 한 불안과 불확실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네 처지는 1백여 개 회원국 중 (대만은 회원국이 아니다) 가장 낫지 않겠느냐는 한 대표단의 얘기가 자부심의 과잉으로만은 들리지 않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달라진 처지가 계속되리란 보장은 아무 데도 없다. 어차피 세계 경제라는 하늘이 어두워지면 우리라고 그 그늘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IMF 총회에 참석했던 우리 대표단이나 금융 기관장들은 여기저기서 돈 좀 빌어가라는 통에 곤욕을 치르기도 한 모양이다.
몇몇 외국은행에서는『그럴 수가 있느냐. 앞으로 상황이 나쁠 때는 정말 생각지 않을 거냐.』는 식의 반 협박 조 요청도 해왔다는 얘기다.
이같은 상황은 IMF 취재 후 들른 런던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금융 기관들은 서로 자기네 돈을 쓰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이를 적당히 무마하는데 가장 신경이 쓰인다는 게 현지에 나가있는 우리 은행들의 한결같은 얘기였다.
경기가 풀리면서 자금여유는 생겼는데 이를 투자할 데가 마땅치 않다는 게 요즘 국제금융시장의 고민이다.
정작 돈이 필요한 멕시코·베네쉘라·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등은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못 주겠고 신용 좋은 고객이던 한국 같은 나라는 형편이 나아지면서 쓰임새가 줄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형편이 앞으로는 계속 나아진다는 보장만 있으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조금 나아졌다해서 콧대부터 높인 대서는 문제다.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가정은 항상 하고 있어야하고 그런 뜻에서 「필요가 당장 없어졌다 해서 리셉션 한번 열지 않는 식의 자세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 라는 한 금융기관 임원의 지적은 일리 있는 얘기였다.
이번 총회를 전후 해 우려가 무엇보다 큰 관심을 쏟은 것은 원 화의 평가절상 압력이었다.
총회 수주일 전부터 일본 신문들이 한국·대만 등을 포함한 선발개도국의 환율 조정문제가 거론되리라는 애드벌룬을 여러 차례 띄운 바도 있어 더욱 관심을 모았는데 결과적으로 구체적 요구나 협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치는 않은 듯 싶었다.
무엇보다도 현지언론들이 IMF의 해설 기사에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둘러싼 선진국간의 불협화를 전하면서 미국의 환율 조정이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로 한국·대만· 캐나다 등과의 환율 조정이 결여됐기 때문이란 점을 대부분 거론한 것은 미국내의 분위기를 충분히 느끼게 한 대목이었다.
더 더우기 미국의 정책 결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 또 최근의 예로 지난 8월 미국이 공식적인 원 화 절상 요구를 전하기에 앞서 월스트리트저널지 등을 통해 절상 필요성을 은근히 흘렸던 점등을 고려하면 앞으로 우리의 대응이 쉽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스스로는 대만이나 캐나다와 우리와는 같은 대미무역 흑자라도 질적· 양적 차이가 크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해도 이 같은 구별이 미 언론에서 전혀 보도되지 않고 있음도 앞으로 우리의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데 있어 반드시 고려돼야할 것이었다.
이번 총회에서 보여준 개도국들의 논리적 반발은 음미할만한 것이었다.
특히 미국의 농산물에 대한 수출 보조금 지급이 미국 스스로 수입 공산품에 대해 덤핑이나 보조금 지급 등의 이유로 제재 조치를 취하는 것과 상호 모순된다는 점등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IMF총회도 역시 부국과 빈국, 선진공업국과 개도 외채 국들간의 평행선적인 주장의 대결로 끝났지만 세계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재점검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느껴졌다. <박태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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