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보건성 간부의 독백…내러티브 리포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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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맑다. 중국 베이징의 탁한 공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구나. 지난달 말, 나는 나고 자란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등졌다. 지금은 서울의 모처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남조선의 가을 하늘은 이리 높고 푸르건만 마음은 복잡하다. 그래도 아내와 딸이 함께 올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이젠 대한민국이 내 새 삶의 터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이 이곳 남조선에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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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탈북을 결심한 것을 두고 지난 5일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이 “북한 정권 내부의 최측근이 탈북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말이 나올법도 하다. 나는 내각 보건성 보건1국 출신이다. 보건1국은 핵심 중의 핵심 부서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동지와 부인 이설주 동지, 여동생 김여정 동지의 전용 의료시설인 평양 봉화진료소는 물론 간부와 그 가족이 이용하는 남산병원을 관장한다. 내각 안에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다. 평양에선 “중국에 가서 1~2년 쉬다 오라우”라면서 날 베이징으로 보내줬다. 해외 근무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혜다. 하지만 나와보니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다. 같은 사회주의 체제인데 중국은 달랐다. 딸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로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 8월엔 영국 대사관의 태영호 공사가 남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태 공사가 누군가. 조선의 영웅인 항일빨치산 가문 소속이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아들 교육 문제 등으로 고민하다 큰 결심을 했다니. 내 마음도 요동쳤다.

베이징에서 내가 맡았던 업무는 공화국에서 구하기 힘든 의약품을 구매하는 거였다. 일종의 무역일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올해 공화국에서 4차 핵실험(1월6일)에 이어 5차 핵실험(9월9일)을 하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란 끈을 조여왔고 평양에선 이런 저런 요구가 더 많아지고 세지기 시작했다.

공화국의 베이징 대사관은 아마 발칵 뒤집혔을 터다. 베이징은 공화국 외교의 심장부다. 이런 곳에서 다름 아닌 김정은 위원장 동지의 건강 관련 업무를 맡았던 내가 망명을 했으니 난리가 났을 거 아닌가. 안가에 있어 잘은 모르지만 내가 망명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설도 나오고 있을 것이다. 평양에서 대금은 주지 않으면서 구매해 보내라는 의약품이 엄청 많았을 것이라는 얘기부터 나 역시 외화상납금 독촉을 받아 체제에 대한 환멸을 느꼈을 것이라는 얘기 등등…. 일부에선 내가 김정은 일가의 건강을 위한 연구를 맡은 장수연구소에 근무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진실은 차차 밝혀질 것이다. 지금 딛고 있는 이 땅이 아직은 많이 낯설다.

내가 망명을 결심한 며칠 뒤인 1일 남조선, 아니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 주민 여러분들이 희망과 삶을 찾도록 길을 열어 놓을 것이다.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란다”고. 이 발언이 지금 국회에선 논란이 되고 있다지만, 앞으로도 태 공사와 나 같은 이들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나와 비슷한 시점에 베이징 대표부에서 또 다른 간부도 탈북을 결심해 실행에 옮겼다고 들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열망은, 아니 권리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지난달 탈북한 보건성 보건1국 관리의 시점으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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