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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뿌리 한국문화 >4< 고구려 장보고분 닮은 고대무덤 동국대 일본구주지방 학술기행 김상화<동국대 일본학연구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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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9면

선상(후나야마) 고분과 그 근처에 산재한 장보고분을 둘러보러 갔을때의 일이다. 고분앞 논두렁에서 마침 점심을 들고있는 몇사람의 촌로들에게 이 지방의 고분에 대해 물어봤다. 그들의 얘기 속에서 얼핏 「…바루」란 말을 들었다. 처음엔 잘 알아듣지 못해 다시 물었더니 「원」을 「바루」라 발음한 것이다. 필자는 깜짝놀랐다. 선상고분이 있는 곳을 「청원」 이라 하는데 이곳을 그들은「새바루」라 하는 것이었다. 왜 「기요하라」라 하지 않고 「새바루」라 하는가. 그들은 예부터 그렇게 불러왔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 옛말이 이곳에서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원」을 「바루」 라 함은 「원·야」의 고어 「발·벌」이다. 거기다 또하나 새로운 사실은 장식고분이있는 지대를 무슨무슨 「원」이라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청원·죽원·정원등의 호칭이 많으니 이것은『삼국사기』 고구려 초대왕의 장지에, 가령 동원·대수촌원· 막본원·고국원·?원·중천원등등과같이「원」 (발→바루→바루→벌)을 붙여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이 일대에 산재한 고대 무덤을 장보고분이라 부르는데 장보고분이란 어떠한 고분을 말하는가. 그 뜻은 고대인의 무덤 입구나 무덤안의 시체를 안치하는 방에 조각 또는 채색의 무늬를 칠해 놓은 것을 말한다. 고구려의 벽화고분의 양식과 비슷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같은 무덤의 양식은 구주의 중부, 즉 태본 (구마모토) 일대에 처음 나타났으며 이어 뇌호내해(세토나이카이)를 건너 본주의 근기·관동·동북까지 번져갔다가 7세기께 사라진다. 바로 고구려가 멸망하는 시기다. 몇해전 내랑(나라)에서 고송총(다카마수쑤카)이 발굴되어 화제를 모은 일이 있다.
이것도 장식고분의 일종으로 벽화가 우아하고 벽화 내용이 풍부하며 마치 고구려벽화와 같아 크게 주목을 끈 것이다.
장식고분은 지금까지 약2백50기가 발견됐는데 그중 약1백20기가 태본일대에 있다. 선상고분이있는 국지(기쿠치)천유역과 태본평야에서 팔대(야시로)평야에 이르는 지역, 자상반도에서 천초(아마쿠사) 북부에 걸친 지역등이 중심이다.
이러한 지역의 장식고분에 나타난 무늬는 직고식(활모양)·원·동심원·삼각형·?형등 다양하다. 또 그림으로는 무기류로 전통(전통)·방패·칼등이 보이고, 인물을 비롯해서 말·새·배도 그려져 있다. 돌사람·돌말등 묘앞에 세우는 대륙적 유물과 함께 장식고분이 이 일대에 남아 있지만 이러한 것이 북구주의 전다(하카타) 등지에서는 볼수 없다. 이로써 우선 가상되는 것은 구주의 태본에서 오도-제주도로 연결해서 북으로 한반도 서해안을 지나 고구려와 통하는 왕래길로 그 연결선을 그을 수 있는 점이다.
이 루트를 통해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고구려는 필요한 물자, 즉 식량·소금·사철등을 수송했으리라고 보인다. 장식고분에 나타난 많은 선단의 그림, 말등을그린 수수께끼는 이로써 풀리게 되는데 배앞에 새를 그려놓은 것은 풍우나 운무에 항로를 잃었을때 새를 날려서 방향을 잡으러고 한것은 아닐는지. 가?(가마타) 고분 (자토시), 총원제1호고분, 주원(이상 자토군) 등의 고분에 그려진 배는 어느것이나 돛을 달고 큰바다를 항해하는 활동적인 분위기를 떠올리고 있다.
산록지방 고분의 배는 양폭이 높이 솟은 곤돌라형의 배다. 국타천유역에 집합된 물자를 유명(아리아케) 해에 돌출한 자상반도의 돌출지점까지 수송한 중형배임을 알수 있으며 그곳에서 다시 화물을 대선단에 싣고 큰바다로 항해 했음을 이 그림들은 보여주고 있다.
고분구조에 대해서는 필자가 가본 정수(이데라) 고분이 고구려고분의 제2유형인 단실묘와 거의 같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대체로 조각이나 그림의 수법은 졸렬하고 유치하다. 마치 어린 아이의 그림 같다. 이 사실은 아마도 고규려 본바닥에선 벽화만을 그리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겠지만 이곳 구주엔 생산기술자는 있어도 벽화를 그리는 사람은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분묘 축조자들이 서툰 솜씨로 축조와 함께 죽은 인물의 생전 직업이나 공적을 그리거나 새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태본거주 고대사연구회 대표이사 고휴삼박씨는 필자를 또한번 놀라게 한 고대 유적지를 안내해주었다. 그곳은 선상고분 근처였다. 이곳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태본시 북쪽으로 국지천이 있다. 유명해로 그 수량을 쏟아붓는 길이 약1백60km의 긴강.
국지시·녹본군·산록시·옥명시를 거쳐 마지막으로 유명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강에는 몇줄기 지류가 있다. 그중 하나가 강전천이다.
이것이 국지천과 합류하는 지역을 옥명군 국수정 강전이라 한다. 이곳에 많은 고분이 점재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앞서 보아온 선상고분이다. 이 고분의 경사면에는 그곳 주민들이 오래전부터「동카라링」 이라 불러온 천연의굴 (혈)과 그것을 잇는듯한 긴터널이 있다. 바로 이 유적이다. 이에 관한 지방의 기록은 없고 현재 명칭만 남아 있다.
이 유구는 선상고분을 내려다보는 표고 1백m가 못되는 언덕의 경사면에 있다. 두개의 천연굴 (그중 하나에는 인공통로가 있다)과 두개의 터널이 이어져있다.
터널을 빠져나간 곳에 3백m의단락이 있는데 차츰 낮아진다.
대혈에서 나와 경사면 약60m를 더듬어 가면 언덕위에 닿는다. 이 기이한 굴을 뚫고 기어나오듯 나오니 일종의 공포감과 함께 신비감에 사로잡힌다.
이 불가사의한 굴이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1974년 8월이었다. 그뒤 학계의 주목을 끌어 태본대학에선 두차례에 걸쳐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견후 몇가지 가설이 나왔는데 학술조사후에는 거의 부인되고 말았다.
관개용의 수로, 옛성의 비밀통로등의 가설이 지배적이었으나 물을 대야할 경지가 없고 그곳에 성이 있은 흔적도 없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결국 조사팀은 민속학적 측면에서 재검토해야 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민속학적으로 이 유구를 설명한 설은 지금까지 몇가지가 나왔다. 그중에서 필자도 동조하는설로서 일본추리작가로 유명한 송본 (마쓰모토) 청장씨는 이렇게 해석한다. 즉 『일본에서 흔히 볼수있는 큰바위를 모시는 숲속의 성소와는 다르다.
이것을 제사의 시설로 본다면 왜 긴 터널을 구축했을까. 이는「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괴신이 생각난다. 특히 「고구려조」에 「그나라 동쪽에 대혈이 있어 수혈이라 부르는데,나라안이 크게 모여 수신을 맞아 제를 지내며 목수를 신좌에 모신다」고 되어있다. 그러나「동카라링」이라 부르는 뜻은 모르겠다』 고 말했다. 필자는 이말을 알타이어족에 공통된 「배천자·천」을 나타내는 말「듬가리·댐구리」 (등고)로 보고「링」은 존칭어 「님」으로 본다.
필자는 평소 고구려를 일으킨 천제의 아들 해모수의 후손이 구주중부일대에까지 세력을 폈으며 대화(야마토) 조정에 끝까지 항거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들 고구려부족의 이름은 「태전」(구마소) .
「해모수」 와 「태용」은 같은 어원을 갖고있다.
선상고분 기슭의 동카라링앞에서 필자는 이런 생각과 함께 다시한번 옛고구려의 깊은 문화자국을 목도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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