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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도 채찍도 없이…‘철강·유화 구조조정’보고서 낸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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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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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치고, 줄여라”

산업부 “공급 과잉” 사업재편 주문
세금 투입 조선·해운과 상황 달라
금융·세제 지원 없어 효과 미지수

공급과잉 업종으로 지목된 철강과 석유화학 업종에 대한 정부 대책의 밑그림은 이렇게 요약된다. 해당 기업이 시설 통폐합이나 M&A(인수·합병)를 통해 ‘군살’을 빼야한다는 것이다.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3차 산업구조조정분과 회의에서 “공급과잉 산업의 선제적 설비조정과 감축이 불가피한 시점”이라며 “구조조정을 지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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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철강업의 경우 7억5000만t 규모의 공급과잉이 빚어지는 가운데 각국의 수입규제 확산까지 더해지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정부는 후판(厚板)의 설비 감축 및 매각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와 관련 철강업을 컨설팅한 BCG(보스턴컨설팅그룹)는 국내 철강사가 보유한 후판 공장 7곳 중 3곳을 폐쇄해야 한다는 내용을 보고서에 포함시켰다. 후판은 두께 6㎜ 이상 철판이다. 선박 건조나 해양플랜트 건설 등에 주로 쓰인다. 포스코·현대제철·동국제강 등 ‘빅3’기업이 생산 중이다. 이들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주문한 셈이다. 강관(내부에 빈 공간이 있고 봉 형태를 띠는 철강제품) 역시 설비 통폐합이 필요한 제품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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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석유화학업계에도 사업재편을 주문했다. 현재 이 업종에 대한 컨설팅을 마친 베인앤컴퍼니(Bain & Company)는 33개 석유화학 주요품목 중 4개 품목에 공급과잉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페트병의 원료인 테레프탈산(TPA), 장난감용 플라스틱 소재인 폴리스티렌(PS)은 단기간내 설비조정을 통한 생산 감축이 필요한 품목으로 꼽혔다. 타이어 원료인 합성고무(BR, SBR)와 파이프용 소재인 폴리염화비닐(PVC)는 추가 증설없이 고부가 품목으로 전환해야 하는 품목으로 지목됐다. 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케미칼 등이 이런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이런 정부의 대책이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기업이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어서다. 철강·석유화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조선·해운업처럼 나랏돈이 들어가 채권단이 기업의 주요 결정을 좌지우지할 상황도 아니다. 정부가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채찍’도 갖고 있지 않다.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원샵법)이 시행되고는 있지만 산업 재편에 따른 인센티브는 여전히 부족하다는게 업계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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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철강 기업들은 특히 후판 설비 감축에 일제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일률적인 감축이 과연 각사의 기업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질 지 의문”이라며 “설비를 감축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를 유지해야 수요 변동에 대응할 수 있을지 면밀히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업종 구조조정 방향에 대해서도 ‘알맹이’가 빠졌다는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익히 알려진 문제점으로 업체들도 논의했던 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는 원샷법을 통한 지원을 강조하고 있지만 재계의 생각은 다르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산업의 향후 방향성을 제시한 건 의미가 있다지만 사업재편을 위한 인센티브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업재편 지원에 대한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들이 M&A와 같은 구조개편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금융·세제상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는 민간 주도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백웅기 상명대 금융경제학부 교수는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었는데 여전히 구조조정은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보니 업계의 자율 구조조정이 늦어진 측면도 있다”며 “정부가 지나치게 나서면 통상 마찰 문제와 같은 부작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오는 30일 보다 구체적인 산업경쟁력 강화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단 조선업에 대한 대책 발표는 다음달 이후로 미뤄졌다. 산업부 관계자는 “업계 내 이해관계가 엇갈려 컨설팅 최종 보고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전영선·하남현·이승호 기자 ha.nama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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