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선 TV토론] 트럼프 "클린턴은 스태미너가 없어", 클린턴 "트럼프는 여성·인종차별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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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트럼프는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과 무역문제, 건강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작전에 나섰다.

발언 시간도 트럼프가 42분 6초, 클린턴이 37분 31초로 트럼프가 5분 가량 많았다. 하지만 최근 4일 동안 유세도 않고 TV토론 준비에 올인한 클린턴의 준비된 반격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클린턴이 파 놓은 '함정'에 빠졌다.

트럼프는 지난 11일 비틀거리며 사실상 실신한 모습을 보였던 클린턴의 건강을 겨냥해 "대통령이 되려면 강한 체력이 필요한데 클린턴은 스태미너가 없다"는 말을 4번이나 반복했다. 그러자 클린턴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음~ (나처럼) 112개 국가를 여행하고 평화협정 및 휴전을 협상하고 11시간 동안 의회에 나가 증언하고 온 다음에 나에 대해 스태미너를 논하라"고 맞받아쳤다. 멋쩍어진 트럼프가 다시 "클린턴은 스태미너도 없고 대통령이 될 얼굴도 아니다"고 조롱하자 클린턴은 이 실언을 놓치지 않았다.

"이 사람(트럼프)은 여성·인종차별주의자다. 여성을 돼지, 굼벵이, 개라고 부른 사람이다. 또 미인대회에 참가한 한 여성이 라틴계라는 이유로 '미스 하우스키핑(청소부)'이라고 불렀다. 그들 모두 (트럼프를 응징하러) 투표에 나설 것임을 기억하라." 장내에 박수가 쏟아졌다.
원하는대로 진행이 안 되자 트럼프는 조급함이 얼굴에 묻어나왔다. 워싱턴포스트는 "클린턴이 극도로 민감한 트럼프의 피부를 바늘로 콕콕 찔렀다"고 비유했다.

최대 10명의 후보가 참석한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의 TV토론은 트럼프가 장악했었다. 하지만 본선 TV토론은 잠시도 쉴 수 없는 1대 1의 맞장 토론. 상대적으로 정책 이해도가 높고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와 1대 1 토론을 오랫동안 치러온 클린턴이 유리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게다가 트럼프의 '돈 문제'를 클린턴이 교묘하게 자극해 트럼프가 냉정함을 잃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클린턴이 트럼프의 납세 보고서 미공개 이유에 대해 "첫째 자신이 말하는 것만큼 부자가 아닐 수 있고, 둘째 자신이 주장하는 만큼 기부를 안 했을 수도 있다"고 꼬집은 것을 가리킨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부(富)를 부정하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트럼프의 반짝이는 레토릭이 빛을 발한 장면도 몇차례 있긴 했다. 클린턴이 자신의 이메일 스캔들을 "실수"라고 하면서 트럼프의 납세 기록 공개를 요구하자 "그건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것이다. 클린턴이 이메일 3만 건을 다 까면 나도 내 납세 기록을 공개하겠다"고 받아치자 장내에 박수가 쏟아졌다. 클린턴의 "트럼프의 기질은 대통령 결격사유"란 비난에 "내 기질은 내 장점 중의 하나"라고 맞받았다.

미 대선에는 TV토론과 관련한 징크스가 있다. 지지율 격차가 5%미만인 상황에서 TV토론에 돌입할 경우 1차 TV토론을 제압한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1980년 이후 한번도 에외가 없었다. 이번 대선은 토론 직전 지지율 격차가 불과 1%였다.

이날 트럼프는 토론이 끝난 직후 '패배'를 인식한 듯했다. 청중석에 앉아 있던 부인 멜라니아, 장녀 이방카 등이 그를 맞이했지만 바로 토론장을 총총히 떠났다. 토론장에 남아 청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활짝 웃는 클린턴과는 대조적이었다.

트럼프는 토론 후 기자들의 질문에 "실은 빌 클린턴에 대한 매우 혹독한 사실을 TV토론에서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첼시(클린턴의 외동딸)가 거기(청중석 앞줄) 앉아있어 얘기하지 않았다. 다음 토론에선 아마 말할 것"이라고 말했다. 패자의 핑계치고는 초라해 보였다.

롱아일랜드(뉴욕주)= 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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