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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주인과 변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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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무리 선진적인 제도를 추진하더라도 기본적인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았을 경우 효과를 거두기란 정말 어렵다.

실물경제와 밀접한 각종 세제(稅制)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세금 내기 꺼리는 현실을 무시한 채 이상적인 제도의 도입만을 서두르다 보면 조세 저항을 불러오고 결국 실패하기 십상이다.

재정경제부는 의욕적인 내용을 담은 세법 시행령 등을 9일 발표했다.

다음달부터 아르바이트생을 포함한 종업원을 한 사람이라도 둔 자영업자(개인 사업자)는 반드시 종업원의 임금 내용을 세무 당국에 신고하도록 한 게 골자다. 저소득층의 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할 때 정부가 이를 보전해 주는 근로소득보전지원세제(EITC)를 도입하기 위해서다. 양극화를 해소하고 자영업자나 일용직 등 저소득 근로자의 정확한 소득 파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정부는 설명한다.

그동안 자영업자들은 '유리지갑'이라고 불리는 봉급생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금을 덜 낸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들의 실제 소득을 밝혀내고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 근로자들을 지원하겠다는 제도의 취지야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결코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전국의 수많은 식당이나 치킨집.피자집.편의점 등 영세 자영업자가 종업원 임금을 일일이 신고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회계장부조차 쓰지 않았던 영세 식당 주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임금 지급 조서' 작성에 쉽게 따를지도 의문이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부담만 지운다'는 불만이 다시 터져나올 수도 있다.

상당수가 연간 매출을 축소 신고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실제 매출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해 신고를 기피.축소하거나 아예 종업원의 채용을 꺼리는 상황도 예상된다.

일선 세무사들은 제대로 신고된 종업원 임금 내용 자료가 있다면 이를 비용으로 역산해 실제 매출액 수준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대로 신고하지 않는 업주들에 대해 2%의 가산세를 매기겠다고 한 것도 대표적인 탁상행정이란 지적이다.

현행 제도에서 허위.축소 신고자를 적발해 내려면 세무조사 외에는 방법이 없다. 현재 전국의 자영업자 중에선 고작 0.3%만이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모든 자영업자가 조사를 한 번 받으려면 무려 300년이 걸린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국세청의 세무조사 인력은 지방 세무서를 모두 합해 4000여 명에 불과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부동산 투기조사, 대기업 세무조사 등에 동원되고 있어 전국 400만여 개에 달하는 자영업자의 신고 실태를 일일이 조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식당 주인들을 다그쳐 종업원의 정확한 임금 신고를 받아내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시급한 일은 30%대에도 못 미치는 고소득 자영업자의 소득파악률을 높여 나가는 일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변호사.의사 등 15대 전문직 가운데 17%가 월 평균 소득을 200만원 미만으로 신고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심지어 79억원의 수임료를 받은 변호사가 고작 1억원만을 신고하는 판이다. 고소득 전문직이나 대기업형 자영업자의 과표를 양성화하거나 숨겨진 매출이나 무자료 거래 등을 들춰내 세금을 제대로 매기는 데 우선 주력해야 하지 않을까.

턱없는 대책을 들고 나와 혼선을 빚느니 실현 가능한 일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게 순리다. 아직도 공개를 꺼리는 고소득 변호사들의 수임료 자료를 제출받아 세금을 제대로 걷는 일부터 먼저 해결하고 볼 일이다.

홍병기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