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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카페 같은 보건소…영주시의 공공건축 디자인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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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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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공서 건물의 이미지를 벗은 풍기읍사무소. 사방에서 출입할 수 있게 입구가 여러 개다. [사진 황규백 작가]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새로 지어진 풍기읍사무소의 출입구는 1층에만 3개다. 2층짜리 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람 인(人)자’를 닮았다. 출입구가 중앙에 달랑 하나인 직육면체 관공서 건물들과 다른 모양새다. 세련되게 잘 디자인한 갤러리 같다. 장기진 읍장이 익숙하게 건물 안내를 했다. “관공서 건물처럼 안 생겼죠? 공공 건물이 바뀌니까 마을에도 변화가 생기는 것 같아요. 2층 옥상 데크에서는 공연도 해볼 참이에요.” 설계를 맡은 디자인그룹 오즈의 최재원 소장은 “기존 관공서 건물의 딱딱한 이미지를 깨고, 주민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교차로 같은 공간이 되길 원했다”고 설명했다. 건물의 한쪽 출입구 벽면에 상패가 3개나 붙어 있다.

도시 마스터플랜 짜 건축가 영입
읍사무소·경로당 등 20여 개 지어
주민에 문턱 낮춘 소박한 설계
주요 공공디자인·건축상 휩쓸어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 우수상, 대한민국 신인건축사대상 대상, 한국농어촌건축대전 대상을 탔다.

풍기읍사무소뿐 아니다. 경북 영주시에 상복이 터졌다. 주인공은 20여 개의 공공 건축물이다. 한국건축문화대상 국무총리상,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토해양부장관상, 김수근 프리뷰상 등 최근 들어 국내 유수의 건축상을 휩쓸고 있다. 수상작들의 규모는 크지 않다. 보건진료소·읍사무소 등 시민들이 자주 사용하는 공공 공간이 대다수다. 크고 화려하기보다 소박해서 좋고 바른 디자인이다. 건축가가 사용하기 쉽게 디자인한 경로당에서 동네 노인들은 “정부에서 우리 사는 데 관심 가져주는 것은 새마을운동 이후 처음”이라고 감격해하고, 연이은 수상 쾌거에 서울의 건축가들은 “대체 영주시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영주시의 이런 변화는 2007년 시작됐다. 계기는 한 장의 공문서였다. 발신자는 국내 최초의 건축도시공간분야 국책연구기관인 건축도시공간연구소(아우리·AURI), 수신자는 인구 10만여 명 규모의 지방 도시 10곳이었다. “도심 재생 관련 통합 마스터플랜을 공짜로 만들어 주겠다”는 게 문서 내용이었다. 당시 지방도시는 신도심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작은 도시 안에서 아파트 위주의 신도심이 지어지고 나면 구도심은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소도시마다 ‘앓는 이’ 같은 이슈였다. 그런데도 아우리의 제안에 선뜻 나서는 곳이 없었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개하고 참여해 달라’는 요구 조건 때문이었다. 그중 영주시가 나섰다. 영주시 도시과 안창주 주무관은 “‘건설보다 이제는 관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시 전체가 적극 나서서 아우리와 손잡게 됐다”고 전했다.

인구 11만의 도시, 영주의 도시·건축 관련 총 조사가 3년간 이뤄졌다. 안 주무관은 “도시를 개발하기 위해 도시 공간을 먼저 조사하고 콘셉트를 정하는 큰 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전까지 몰랐다”고 털어놨다. 틀을 짠 뒤 남은 건 실행이었다. 영주시는 2010년 시장 직속의 디자인관리단을 신설했다. 아우리에서 영주시 마스터플랜을 연구한 조준배(현 SH공사 재생기획처장) 연구본부장이 단장을 맡고, 윤승현(인터커드 건축사사무소) 소장 등 서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3명을 영주시 1기 공공건축가로 영입했다. 윤 소장은 “당시 조 본부장이 아우리를 떠나 영주시 계약직 공무원으로 간다는 건 큰 희생이었고 화제였다”고 말했다. 영주시의 공공건축가는 3기까지 이어진 상태다. 현재 공공건축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서울시보다 앞선 행보였다. ‘공공 건축물부터 잘 디자인해 주변을 점차 바꾸자’는 행동강령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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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건축가와 영주시가 합심해 10년째 공공건축물을 업그레이드한 결과다. 문수면 조제리에 지어진 조제 보건진료소의 모습. [사진 김재윤 작가]

2012년 문수면 조제리에 들어선 조제 보건진료소는 영주 시민을 두 번 놀라게 했다. 공공건축가인 윤 소장이 설계했는데 짓자마자 큰 상 두 개를 휩쓸었다. 한국농어촌공사사장상(한국농어촌건축대전)과 국무총리상(한국건축문화대상)이었다. 윤 소장은 “100평도 안 되는 시골 공공 건축물이 건축문화대상을 받은 게 처음이었다”고 전했다. 공사비용은 기존에 보건소 짓는 정도로 썼다. 그는 “똑같은 조건으로 공사하더라도 결과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이를 악물고 임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낙후한 시골 마을에 카페 같은 보건소가 들어섰다. 조제 보건진료소에서 29년간 근무했던 김순애 보건소장은 “시골 마을에 들어와 수십 년을 봉사하며 청춘을 보냈는데 사택도 있는 진료소가 지어져 보상받는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며 “동네 어르신들도 문화 혜택을 받는다며 좋아하셨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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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가흥동 한절마 경로당의 전경(위). 경로당 벽면마다 툇마루가 놓여 있다. [사진 진효숙 작가]

가흥동의 한절마 경로당은 노인들이 벽에 기대앉는 걸 좋아하는 특성을 고려해 벽면마다 툇마루를 설치했다. 경로당을 디자인한 조재원( 01스튜디오) 소장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따로 모이는 것을 보고 두 개의 공간을 분리했고, 큰 모임이 있을 때는 터서 넓게 쓸 수 있게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작은 공공 건축물뿐 아니라 큰 규모의 건축물도 바뀌기 시작했다. 영주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삼각지 땅에는 노인종합복지관·장애인종합복지관과 체육관이 올 연말 완공을 목표로 지어지고 있다. 영주 시민운동장 부지 안에 실내수영장과 복싱훈련장도 짓는다. 수많은 공공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고, 도로·재래시장 등 기존 도시 인프라 또한 마스터플랜 안에서 재정비되고 있다.

이를 위한 사업비를 영주시가 어떻게 마련했을까. 답은 중앙부처 및 경상북도 주최의 공모사업에 있다. 영주시가 2008년부터 올해까지 각종 도시건축 공모전에 참여해 따낸 국비 및 도비는 총 448억원에 달한다. 시비는 253억원 정도 투입했다. 조준배 전 단장은 “마스터플랜에서 영주시 현황 진단과 향후 계획을 잘 정리해 놓은 터라 공모전에 참여했을 때 성과를 높일 수 있었다” 고 설명했다.

서울의 건축가를 데려오기 위해 공모전의 판을 투명하게 만들기도 했다. 영주시 주최로 진행하는 현상설계 공모를 아예 외부 단체에 맡겼다. ‘지역에서 짜고 치는 판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영주 실내수영장을 디자인해 올해 김수근 프리뷰상을 수상한 김수영(숨비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외국과 달리 우리는 공모전 심사위원을 잘 공개하지 않는데, 영주 실내수영장의 경우 공모전을 진행한 새건축사협회에서 심사위원 명단을 사전에 다 공개해 믿고 참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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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는 2012년 경관 및 디자인 조례를 제정했다. 디자인관리단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조례에 따르면 영주시장은 영주의 경관 및 디자인 관리를 위해 관계 공무원과 디자인 전문가로 구성된 디자인관리단을 둬야 한다. 조 전 단장은 “도시 정책이 시장과 선거에 따라 누더기로 바뀐다면 영주시는 달랐다. 건설보다 관리의 시대를 내다보고 공공과 전문가가 힘을 합쳐 기존에 있는 것을 잘 꾸미고 업그레이드한 측면에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가했다.

영주=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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