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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 끝나가는 젊음을 견딜 수 없는 당신에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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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시작합니다. 분노, 질투, 외로움, 조바심. 나를 스스로 괴롭히며 상처를 주는 내 마음속 몬스터들입니다.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통해 내 안의 몬스터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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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한 아줌마의 삶, 공포로 다가오지만
미래의 가능성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다
좋았던 과거에 대한 미련 과감히 접어야

“자꾸만 눈물이 나요. 나도 이러는 내가 싫은데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물론 늘 이렇게 우울하진 않다. 해맑게 웃으며 달려드는 아이를 바라볼 때면 행복하다. 가슴에 안긴 아이는 작고 가볍지만 마음을 꽉 채운다.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소영씨는 생각한다. 내 삶에 이 아이만큼 의미 있는 존재는 없어. 아이는 내가 꼭 필요하고, 나는 아이를 사랑해.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요즘은 거울을 보기가 두렵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질 때면 고개를 돌린다. 저 사람은 누구지? 적당히 늘어진 웃옷과 탄력을 잃은 피부. 며칠 전에는 무심코 흰 머리를 뽑다 갑자기 뒷목이 뻣뻣해졌다. 화장대 위에 뽑아 놓은 흰 머리카락이 스무 개를 넘어간 것 아닌가. 하지만 이런 외모는 아무 것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마음에 있다. 답답하다.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며 오전 시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책도 들여다보고 인터넷으로 신문도 본다. 그런데 뭔가 확 다가오지 않는다. 유리판 몇 장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다. 가슴이 답답해져 텔레비전을 튼다. 젊은 사람들. 요즘은 젊은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보기 좋고 예쁘지만 자꾸 심술이 난다. 저들의 인생은 열려있고 내 인생은 이미 닫혔다. 저런 시간, 저런 피부, 저런 통통 튀는 밝음은 이제 없어.

마음을 진정시켜 본다. 저들도 고민이 많겠지. 답답할 거야. 요즘 취업도 안 되고 미래는 암담하다잖아. 이렇게 스스로 위로를 하지만 곧 그 위로에 또 절망한다. 나를 높일 방법은 없고 상대를 낮춰야만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 이제 곧 돌아올 아이를 웃으며 맞을 수 있을까? 소영씨는 며칠 전처럼 아이에게 또 짜증을 낼까봐, 아이 앞에서 한숨을 쉴까봐 답답해진다.

소영씨는 자주 울적하다. 때로는 피부의 탄력을 높여준다는 화장품을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요즘 유행하는 옷도 사보며 그렇게 나이든 것은 아니라고, 조금 지쳤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토닥인다. 그래도 자주 화가 난다. 아이가 끝도 없이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느껴질 때면 이 조그만 녀석이 내 인생을 다 잡아먹는다는 공포가 든다. 얼마 전에는 남편에게 버럭 화를 냈다. 새로 산 옷을 입고 보여주자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아가씨가 아니야’ 말하며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것 아닌가. 그 미소가 더 보기 싫었다. 그 웃음 때문에 내가 지금 이런 처지에 빠지고 말았어. 그렇게 가족에게 화를 내고 나면 밤에는 잠을 이루기 어렵다. 내가 한심하고 이렇게 한심하게 살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내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내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사람은 애도 반응을 거친다. 자식에 대한 애도가 가장 격렬하지만 부모 또는 배우자를 잃은 뒤에도 사랑이 있었다면 애도가 있다. 감정이 오고 갈 수 있는 현실에서 더 이상은 감정을 주고받을 수 없는 기억으로 누군가를 보내야 할 때 애도 반응은 일어난다. 기억에 묻으려면 이제 감정은 끊어야 하는데 감정이라는 것은 끊으려고 하면 할수록 공격받은 맹수처럼 사나워진다.

애도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만 오지 않는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은 스스로에 대한 애도 반응을 경험한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 부인하고, 내가 좀 더 노력하면 뭔가 다른 방법을 쓰면 괜찮을 거라고 타협을 시도한다. 그러다 왜 나만 이래야 하냐고 화를 내고, 그 분노가 어떤 효과도 없음을 알게 되는 순간 우울감에 빠진다. 결국은 타협하고 받아들이지만 그런 수용은 한 번에 이뤄지지도 않고 완벽하게 이뤄지지도 않는다. 다시금 현실을 부정하고, 또 분노에 휩싸이고, 몇 번이고 다시 우울감에 시달린다.

죽음만 애도를 유발하는 것도 아니다. 내게 소중한 것이라면 우리는 쉽게 떠나보낼 수 없다. 소영씨 역시 마찬가지다. 소영씨는 자신의 젊음이 영원히 떠났음을 견딜 수 없다. 아이가 없던 시절, 스스로 뭐든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한 대로 살아도 되는 시간. 실패해도 다시 해볼 미래가 있고, ‘그 나이에 좀 과한 거 아냐? 이제 젊을 때가 아니라고’ 따위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될 시간은 끝났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가부장제의 압력이 강하고, 결혼한 여성은 결혼 전의 여성과는 다른 존재가 되길 강요받는다. 예전에 딸이라서 말도 안 되는 무시를 받고 살던 시절엔 결혼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대우를 받으며 성장한 여성이 많지 않음에도 결혼은 같은 조건을 여성들에게 강요한다. 개인으로서의 삶은 포기하고 가정 전체가 성취하는 것을 자신의 성취로 느끼라고 요구한다. 나이를 먹으면 책임질 일이 많아지는 것은 남녀가 동일하지만 여전히 선택의 폭은 남자에게 한결 넓다.

소영씨가 아이를 한없이 사랑하면서도 아이에게 종종 화가 나고,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우울해 하고, 아줌마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이유는 그가 아직 젊음의 상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여전히 애도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잃은 것이 젊음뿐이라면 그래도 나이를 먹으면서 좋은 점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젊음에 더해 삶의 가능성도 잃었다고 믿고 있기에 애도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도가 극심한 이유가 자신의 삶이 자식을 통해 이어질 가능성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듯, 자기실현의 가능성이 소멸되었다는 두려움은 소영씨의 애도를 쉽게 끝나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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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후두암에 걸린 아버지의 죽음과 맞닥뜨린 가족의 이야기다. 차가운 현실과 잔잔한 슬픔, 삶의 희망이 동화처럼 어우러졌다. 왼쪽 삽화는 이 책 속의 삽화. 미메시스, 1만6800원.

하지만 소영씨의 가능성이 정말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가 애도할 부분은 분명 있지만 자신의 미래, 변화의 가능성까지 애도할 일은 아니다. 수명이 길어진 덕분에 지금 이 시간은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생각보다 짧고, 이 순간 스스로 정체돼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역시 온 몸으로 경험하고 넘어간다면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경험이고 스스로를 성숙시킬 힘을 갖고 있다.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오히려 힘든 일이고 이런 일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라면 더 많은 일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

소영씨는 지금 당장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물러나 있으니 겁이 나고, 주어지는 기회가 적으니 막막할 뿐. 하지만 소영씨가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여성을 무시할 뿐이고 그 무시는 집과 직장을 가리지 않는다. 낡은 가부장제의 구조는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여성들을 병적 애도에 빠지게 한다. 다행인 점은 이미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소영씨는 과도한 애도를 멈춰야 한다. 아직 죽지 않은 것까지 애도할 필요는 없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살 때가 아니라 현재를 더 느끼며 살아야 한다. 그 현재가 죽지 않은 가능성을 미래로 만들어 소영씨에게 선물로 가져다 줄 것이다.

서천석 1969년생.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의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음의 병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가 됐다.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우리 아이 괜찮아요』 등 육아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이자 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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