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라 복식-묘제 등 밝힐 귀중한 사료|경주 용강고분의 채색토용이 뜻하는 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경주 용강동고분의 토용발굴은 통일신라시대의 묘제연구·복식·제도연구와 조각사연구를 위한 더 없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학자들은 앞으로 발굴이 계속되면서 더 많은 부장품이 발견됨에 따라 통일신라때의 삶의 모습을 뚜렷이 재현할수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주 용강동고분에서 출토된 채색 토용(토용)을 사진으로 접한 복식연구가 석주선교수(단국대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장)는 『상대 복식연구의 최대 자료』라며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상대 복식사 연구는 현재까지 고분벽화에 의존해왔으나 그 예가 흔치 않아 고충이 컸으며 토용의 출현은 그만큼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것.
석교수는 『실물을 보면 더 확실한 얘기를 할 수 있을것 같다』면서 토용의 전체적인 의복처리에 따라 문·무관으로 나눌수 있다고 말했다.

<당의 영향 받은듯>
본지 1면에 실린 사진(우)의 인물은 소매가 넓지 않고 모자가 단조로운 점, 목부분의 처리를 죈 점 등으로 보아 무관 같다』고 석씨는 말했다. 그에 반해 사진(좌)는 문·무관이 확실치 않으나 사진(우)에 비해 소매·모자·목부분 처리가 문관에 가깝다고 말했다.
사진(중)의 인물 확실한 문관이라고 설명했다. 옷 소매가 매우 넓고 선이 부드러운 점, 토용이 한꺼번에 20여개나 나온 점 등으로 보아 시녀일 수는 없고 높은 신분의 주인공을 받드는 신하 신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룡씨(고고학자)는 『흙으로 만든 원시적이고 조그만 토용은 더러 나왔으나 가채로 완전한 모습을 갖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이번 것은 조형미술품으로 볼수 있으며 삼국시대 전통을 이어받고 7세기 중국 당나라토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석인의 대용 추정>
김씨는 이번 토용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왕의 무덤앞에 나타나는 문석·무석 등 석인의 대용인 것으로 추정했다.
김씨는 이 토용이 ▲통일기에 들어 석인이 나타난 뒤의 대용품인지 ▲석인이 나타난 뒤의 대용품인지에 따라 시대 구분이 달라진다고 보았다. 앞의 경우라면 신라통일직후인 7세기초로 보아야하며 뒤의 경우는 8세기 이후로 추정된다는 것. 7세기초의 것이면 왕능이 틀림없고 8세기 이후라면 왕 혹은 왕족의 묘로 범위가 넓어질수 있다고 보았다.
발굴단을 지휘한 김정기문화재 연구소장은 『벽화발굴에 버금가는 중요한 발견』이라고 말하면서 『순장제가 폐지된 지증왕(500∼513년)이후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석실분이며 주인공의 신분은 왕과 왕비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문관과 시종을 거느린 신분이었다면 왕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시상대앞서 출토>
김기웅씨(문화재위원장)는 『복식과 머리모양 등이 중국당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을 알수 있다』면서 『삼국사기에 김춘추가 당에 다녀온후 당의 복식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통일신라 초기 관복의 모습이 이 토용들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관복의 모습이 민간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용강동고분의 토용들은 시상대(시상대) 앞에서 발굴되어 우리나라 명기(무덤에 쓰는 부장품)부장의 풍습을 실증시켜 주고 있다.
토용의 부장풍속은 중국에서 기원전인 상(BC1100연대?)부터 시작, 청대까지 계속되었다. 은·주대의 토용은 소재를 청동으로 했고 전국시대에는 도기, 진·한대에는 이번 용강동에서 발견된 가채토용이 나타난다.

<묘실에 합장풍속>
진대에는 진시황의 무덤에서 나타나는 바와같이 실물대의 크기였으나 한대부터 차츰 작아져 20∼40㎝로 줄고 유약을 바른 것도 나오기 시작한다.
부장법은 진대에는 묘실에 넣지 않고 따로 굴을 파서 묻었으나 한대에는 봉토아래 묘실주변에 배치했고 당나라때 와서 묘실에 넣기 시작했다.
용강동에서는 묘실에 넣었으므로 당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임재걸·이근성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