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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석 ‘예행연습’ 삼아 선물 구입비용 30% 이상 줄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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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6 면

추석을 앞둔 지난 13일 한 시민이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과일선물세트를 고르고 있다.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한우·굴비 등 고가의 선물세트보다 5만원 이하의 실속형 선물이 많이 팔리고 있다. 김경빈 기자

피할 수 없으면 일단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김영란법 시행이 불과 열흘 앞으로 다가오자 “삼성전자·현대자동차는 어떻게 하느냐”며 대표 대기업의 대응을 궁금해하던 기업들이 스스로 대비책 마련에 나섰다. 홍보·프로모션 활동은 지속하되 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는 접대성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관련 규정을 없애는 양상이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은 ‘선물’이다. 올 추석을 ‘예행연습’ 기회로 삼은 곳이 많다. 기업들은 이번 추석부터 선물구입 비용을 대폭 줄였다. 내년 선물구입 예산도 상당 부분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SK 계열사 대표이사실 관계자는 “추석 선물을 구입하는 데 예년엔 3000만~4000만원가량 써 왔는데, 올해 지출 규모는 100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며 “내년 선물구입 예산은 최소 30% 이상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 대기업 계열 발전회사 관계자도 “발송 대상과 금액을 3분의 1가량 줄여서 선물을 발송했음에도 반송된 물품이 꽤 있었다”며 “굴비·갈비·송이 등에서 (상할 우려가 없는) 통조림·욕실용품 등으로 품목을 바꿀 계획”이라고 밝혔다.


“추석 선물비 3000만원서 1000만원으로”한 금융사의 프라이빗뱅커(PB)사업부 본부장은 “8월부터 김영란법이 시행된 것으로 보고 이번 추석을 명절 시범사례로 준비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10억원 이상 현금을 맡긴 고액 자산가에게 보낸 10만원 이상의 한우나 굴비 세트를 사과와 배를 담은 5만원짜리 과일 박스로 바꿨다”며 “일부 PB들은 지역 농가와 계약을 맺고 유기농 참기름이나 은행·호두·잣 등 견과류를 보내는 등 선물 비용을 줄이는 대신 정성을 담은 선물을 보내려는 모습도 눈에 띈다”고 덧붙였다.


제약사 홍보 담당자는 “이번 추석을 앞두고 사장과 부사장 명의로 고객사에 선물을 보내야 할지, 보내더라도 비용을 5만원 선에 맞춰야 할지 등을 일주일 넘게 고민하다 배송 시기가 늦어져 고민”이라며 “지난주 금요일에 이번 추석까지만 예년대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100여 명에게 한우 세트를 보냈는데 추석 안에 배송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내년 설엔 한우 세트 대신 회사 제품을 활용해 최대한 선물 상한선을 맞출 계획이다.


택배업계에 따르면 올해 수령을 거부해 반송된 물품 대부분은 10만원 이상의 식품 선물세트였다. 새누리당 의원실 관계자는 “선물을 보내겠다며 주소를 묻는 전화가 오면 대부분 거절했다”고 했다. 경기도 산하 공기업 관계자도 “내부 감찰 기준인 3만원 이상의 선물은 모두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 모두 고가의 선물을 멀리하는 풍토가 조금씩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실제 유통업계에선 한우·굴비 등 고가의 추석 선물보다 비타민 등 건강식품이나 생활용품 등 5만원 이하의 실속형 선물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


롯데백화점이 지난달 25일부터 지난 6일까지 추석 선물세트 매출을 살펴보니 상대적으로 저가인 건강식품 매출이 지난해 대비 38.8% 늘었고, 가공 생필품(22.1%) 매출 신장률도 높았다. 반면 고급 선물로 여겨지는 정육(9.7%)·굴비(9.7%)·청과(7.5%) 등의 매출 신장 폭은 비교적 크지 않았다.


아예 ‘선물 근절’ 방침을 세우는 기업도 많다. 유통 대기업인 A그룹 관계자는 “5만원 이하의 선물은 법에 어긋나지 않지만 기업으로선 액수보다 법의 취지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며 “올해까지만 선물을 하고 내년 설부터는 일절 선물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실제 업계에선 ‘이번(추석)이 마지막’이란 얘기가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는 28일 이후 제품의 홍보·프로모션 활동을 새로운 질서에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다. 기업으로선 판례가 나올 때까지 제품 홍보를 안 하고 기다리기 어렵다. 이에 일단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만약 법적 문제가 생기면 그에 맞춰 대처하겠다는 입장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대기업의 홍보 담당 임원은 “신제품이 나왔을 때 미디어 초청 행사를 안 할 수가 없다”며 “글로벌 경쟁 업체들이 다 하고 있는 행사를 우리만 하지 않으면 신제품 홍보와 마케팅에 차질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김영란법의 취지가 경쟁업체들이 다 하는 마케팅을 우리만 하지 말라고 족쇄를 채우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만약 통상적인 미디어 행사를 했다가 문제가 불거진다면 최종적으로 법원의 판단까지 구해보겠다”고 했다.


신상품 행사 일단 하고 대응 하기로 통신업계 관계자는 “각 사업부의 판단에 따라 새 브랜드 및 상품 출시 행사 시행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며 “간담회 장소는 호텔 등 별도의 장소를 마련하기보다 회사로 초청해 실무자가 직접 설명·시연하는 방식이 될 것이며 1인당 기준가액은 5만원 이내”라고 밝혔다. 간담회는 공식행사라 김영란법 시행령의 ‘3만·5만·10만원’ 가액 기준을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누락되는 언론사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가액 기준을 5만원으로 정했다는 설명이다. 법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으면 상황 소명 등 해당 케이스에 맞춰 대응에 나선다.


일부 기업은 골프 접대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판단, 관련 예산을 삭감할 계획이다. 한 대기업 계열 상사 관계자는 “영업·홍보 등 대외활동을 하는 부서의 경우 골프 접대 비용을 직원 복지비로 책정해 왔는데, 이를 없애는 안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주차비 대납이나 기자실 운영 등 회사를 방문하는 외부 인사에 대한 여러 지원 제도도 특혜 여부를 검토해 폐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보기술(IT) 업체 B사는 아예 김영란법 시행 전인 9월 초에 잡혔던 골프 접대까지 모두 취소했다. 이 업체 관계자는 “법 시행 전이라 해도 애초에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 미리 당겨 예행연습을 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그동안 농수산물 산지에 직원은 물론 언론을 대동하곤 했던 유통업계 C사 관계자는 “어차피 같은 차 한 대에 바이어나 회사 직원도 같이 가는데 가도 되는 건지, 직원 개인 차로 함께 움직이면 되는 것인지 아직까지도 관련 교육을 받지 못해 헷갈린다”고 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아직까진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어 당분간 신상품 출시 행사는 어려울 것”이라며 “김영란법 위반 가능성을 따져 접대성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규정·방침을 수정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염지현·이소아·김유경 기자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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