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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전엔 딸아들 고루 유산 받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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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이번이 아홉번째 책이다. 이쯤 되면 관심이 시들해질만도 한데 이 책은 예외다.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는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의 삶을 도판과 유물 사진, 재미있는 해설로 생동감 있게 꾸며 놓았던 '선사생활관'편을 시작으로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발해.가야.고려 편까지 모두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유는 이 책의 기획자.편집자.집필자가 쏟아 부은 공력 때문이다. 역사 자료를 박물관을 둘러보듯 독자의 동선에 맞춰 배열하고, 어려운 말 투성이었던 역사서의 내용은 염정섭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등 학자들이 되새김질해 독자가 소화하기 좋게 만들었다.

여기에 고려시대의 의식인 팔관회를 복원한 그림, 조선시대 양반가의 배치.생활상을 엿보게 하는 도판 등 공들인 삽화와 질 좋은 사진이 책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특히 기존 자료가 풍부해지는 고려편부터 책은 맵시가 더 좋아졌다. 그리고 조선시대편에 와서는 한편의 잘 꾸민 소설을 들려주듯 양반가와 서민들의 생활을 묘사해 읽는 맛까지 더해준다.

생활사박물관의 조선실('조선생활관'을 책은 이렇게 표현한다)에 들어서면 먼저 대표적 향촌인 경상북도 경주 양동마을의 전경이 사진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양반 사족의 근거지와 지방관이 사는 읍성이 떨어져 있어 향촌 사회를 이끌어가는 양대 주체가 서로의 독립성을 보장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그리고는 양동마을이 배출한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외숙의 사랑채에서 잠을 깨는 것으로 서두를 연다.

16세기에는 사대부가 장가들어 처가에 사는 일이 적지 않았으며, 부모가 죽으면 딸아들 구별없이 유산을 고루 물려받고 제사도 돌려가며 지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우리가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알고 있는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와 함께 오랫동안 강릉 친정에서 살았는데, '안방 마님'으로서 제사에 앞서 제수를 마련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등 집안일을 챙겼다고 한다.

사임당은 죽기 전 남편에게 새 아내를 얻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여필종부가 덕목인 현모양처가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또다른 모습의 조선 여인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책은 조선 백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과 시간 측정 방법 개발 등 '전통'에만 매여 있었다고 오해하기 쉬운 조선시대의 화려한 발전상을 보여준다. 앞으로 새로운 문화가 활짝 핀 18세기를 중심으로 한 조선 후기, 전통과 근대가 맞부딪치던 개항기와 구한말을 다룬 책들이 나온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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