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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개헌…오욕 굴절로 점철|제헌절에 되돌아본 얼룩진 헌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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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개헌 논의의 한복판에서 맞는 제헌절은 헌법의 구김살을 아픔으로 되새기게 한다. 흔히 하나의 사건은 무수한 역사적 요인들과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헌법이 정치의 중심 문제가 된 오늘의 상황도 지나온 사건들과 연결 지을 때 그 의미가 보다 뚜렷해진다.
헌법은 지난 38년간 8차례 고쳐졌다. 헌법의 구김살은 너무 자주 고쳐졌고 그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권력 장악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데서 기인한다. 개헌에 관한 한 여야 정당이 진정한 합의를 만들어냈던 일이 없다. 언제나 권력이 개헌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랬기에 개헌은 우리에겐 정치 게임으로 기억되고 헌법만이 아니라 정치의 얼룩으로 남았다.
개헌은 변화의 굽이를 돌며 때로는 반복되고 더욱 나쁜 상황을 만들어냈다.
최초의 개헌 제기는 한민당 계열이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의회 내 세력 분포를 내각구성에 반영하지 않은데 반발해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냈다. 그러나 이때는 제헌국회가 임기를 반년도 남기지 않은 때였던 것 등 시기나 내용이 모두 적절치 못해 실패했다.
개헌이 권력 투쟁으로 모습을 선명히 드러낸 것은 52년의 부산 정치파동이다. 그 무렵 이대통령은 의회에 기반을 잃어 간선제의 헌법으로 재선의 희망이 불투명했다. 52년1월 이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냈지만 재적의원 1백75명중 19표의 찬성표를 얻어내는데 그쳤다. 정말이지 이 대통령에겐 최악의 패배였다.
의회내 야파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의원 내각제로 개헌하려 했고 대통령은 국민적 지지를 배경으로 직선제 개헌을 다시 시도했다. 근 2개월의 정치 격동 끝에 의회는 두개의 개헌안을 절충했다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으로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의회의 굴복이고 참담한 좌절이었다.
그해 5월은 대통령의 임기를 불과 3개월 남긴 시기였다. 의회 내 야 파는 가만히 있기만 했어도 국회의 대통령 선출 권 행사로 그들이 말하는 이승만 1인 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의원 내각제를 굳이 시도한 것은 이 대통령에 버금갈 구심점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야 파의 약점과 함께 상황도 나빴다. 그때는 수도가 부산으로 피난 가 있던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그런 시기의 대통령 권력을 의회가 회수하려 했던데 야 파 연합의 한계가 있었다.
집권 자유당이 이대통령의 종신 집권의 길을 트려고 한 것이 54년의 2차 개헌이다. 이 개헌안은 심의 과정에선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표결에서 개헌선인 1백36표에서 1표가 모자라 부결을 선포했다가 사사오입의 수학적 논리를 끌어와 가결로 번복한 데 있다. 분산해 있던 유지집단 성격의 야 파들이 호헌 동지회로 뭉치고 집권 자유당과 겨룰 수 있는 대중 정당으로 발돋움할 길은 바로 변칙 개헌이 열어주었다.
이대통령의 4선이 4·19로 꺾여 무너진 뒤 채택된 의원내각제 개헌은 구 집권세력을 볼모로 했을망정 그런 대로 최초의 합의 개헌으로 헌정의 기틀을 다지는 듯 했다. 그러나 5· 16 군사 쿠데타는 그런 헌정의 순탄한 흐름을 무너뜨렸다.
군정이 주도했고 그래서 의회와 정당의, 참여가 봉쇄됐던 5차 개헌의 제3공화국 헌법에 대해선 야당의 거부나 도전은 없었다.
헌법의 굴절은 69년 박대통령의 3선 개헌이다.
박대통령이 언제 3선을 구상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렇지만 공화당 정부가 헌법의 손질을 생각한 것은 놀랍게도 민정 회복 직후의 일이다. 박 정권이 헌정 회복 초기 한일회담을. 타결해야 했던 것은 불행의 출발이다. 박대통령은 거칠은 데모에 부닥쳤을 때 계엄령을 주저했다. 그럴 때 측근에서 프랑스 드골 헌법의 대통령 비상대권을 아쉬워했다. 대통령은 6· 3 계엄 선포 직후 측근에게 비상 대권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또 다른 한 갈래 개헌 구상은 공화당 내 민간인 그룹이다. 이들은 6·3사태에 마주쳐 헌정의 위기를 실감했다. 군 출신인 당 주류의 성격으로 보아 극한 대립은 잦고 그때마다 헌정 중단의 위험에 마주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경쟁의 무풍지대에 올려놓는 제도, 즉 이원집정부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계엄 해제를 위한 여야 협상 테이블에서 개헌 논의를 제기해 이를 의제로 하는데 합의했다.
그때 여야의 합의는 해엄의 전제였던 언론 규제법에서 깨져 개헌 협상으로 옮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개헌 구상은 묻혀진 불씨로 남았다. 대통령 역시 헌법 연구를 진행시켰다. 그랬기에 3선 개헌은 비상대권을 연구해온 대통령의 막료들과 이원집정 제를 구상하던 공화당의 민간인 그룹인 4인 체제가 주도했다. 4인 체제는 대통령 막료 진에 밀러 이원제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10·17일 조치로 출발한 유신 헌법은 예기치 못했던 정치 폭풍이었다. 평온하던 그해 가을 대통령은 느닷없이 국회 해산과 정치활동 금지를 선언했다. 대통령의 특별 선언은 분명한 헌법침해였다.
10·17조치는 비밀의 장막 속에서 준비됐다. 작업은 72년5월에 시작됐다. 작업 팀은 이후락 정보부장을 총책으로 김치열 차장과 이부장의 측근들, 김정렬 비서실장·유혁인 정무비서관 등 청와대 비서실의 3인이다. 내각에서는 신직수 법무장관이 유일하게 참여했고 김종필 총리마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작업장이 10·26 안의 현장인 궁정동 사무실이어서 궁정동 팀으로 불린 이들의 작업은 대통령의 구상을 문서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대통령의 구상은 실무 팀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은 비상대권에 관심을 가진 이래 비공식 채널로 헌법 연구를 진행시켰다. 법률동의 고위관리에게 장기출장의 기회를 주어 유럽과 동남아 몇 나라의 헌법과 언론제도 등을 연구해 리포트를 내도록 했다.
비공식인데다 과제들이 단편적이어서 숙제를 받은 당사자까지도 위로 출장에 명목을 끌어대는 가벼운 과제쯤으로 알았다. 이렇게 제출된 리포트가 정리된 것이 3선 개헌 전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3선 개헌이 이루어진 직후 정가에 나돈 총통제헌법 구상설이 이 같은 짐작의 근거다.
박대통령은 10·17 특별선언 직전 어느 자리에서, 지나고 나서야 그 얘기였구나 할 기사를 했었다. 그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것은 선거를 통한 정권 연장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집권해보니 4년마다 있는 선거가 큰 부담이다. 큰 일을 마무리하자니 장기 집권이 불가피한데 국민들은 장기 집권을 싫어한다. 인기 없는 정부가 선거에서 이기려니까 부정도하고 무리도 할 수밖에 없다. 선거에서 무리를 하면 더 거센 도전을 받아 정치 안정이 어렵다….』
그러니까 유신체제는 집권당이 무리를 하지 않고도 선거라는 형식을 거쳐 정권의 장기화를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를 겨냥한 개헌이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구상대로 장기 집권과 권력안정의 문을 활짝 연 듯 했다. 그러나 현실은 체제 도전을 불러들어 긴급조치로 질서를 지탱할 수밖에 없었던 이른바 긴급조치 시대의 불행한 출발이 되고 말았다.
8차 개헌이 된 제5공화국 헌법은 10·26 사태이후 국회와 정부가 대립하던 끝에 결국 정부 주도로 탄생한 헌법이다. 국회의 개헌작업이 5·17로 중단되자 최규하 정부가 발족시킨 헌법개정심의 위원회가 개헌을 준비했고 최대통령을 승계 한 전두환 대통령이 마무리를 했다. 이 개헌 역시 국회나 정당의 참여가 막혔다는 점은 5·16후나 유신헌법과 비슷하다. 다만5· 16후와 유신헌법의 정부 주도가 초헌법적이었던데 비해 80년은 합헌 절차를 밟았다는 점이 다르다.
얼룩진 헌정사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면은 세 갈래 흐름이다. 하나는 연임 제한의 벽을 허문 것, 다른 하나는 실질 권력이 헌법이라는 격식을 갖추려 한 사실상의 제헌,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변화를 수용할 필요에서 정치세력이 개헌에 타협해야 했던 상황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우는 모두가 헌법의 얼룩들이다.
헌법에서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따를 때 체제논쟁이 따른다. 체제논쟁 아래에선 타협은 차단되고 정치는 내내 뒤뚱거릴 수밖에 없다는 점은 새겨둘 일이다.
정치세력이 개헌에 타협해야 했던 상황에 적응한 것은 4·19이후 단 한번뿐이다. 80년 봄의 권력의 일시적 진공 상태는 두 번째 마주친 절실한 기회였지만 정당들은 이 기회를 영글 게 하는데 실패했다. 86년의 헌법논의도 드물게 마주친 합의 개헌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에서 가르침을 찾지 못한다면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한다. 헌정의 굴절은 헌법을 포함한 국정의 기본들을 당파의 이해로 재단해 온데 있다는 것을 경험의 진실은 가르치고 있다.

<이영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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