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인의 작가전] 알 수도 있는 사람 #6. speed (2)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수인이 말한 밀림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차가 길들여지기 전에 엑셀과 브레이크를 너무 자주 번갈아 밟아 생긴 문제라는 판단이 섰다. 엔진은 물론 차량 외부조차 어느 회사에서 만든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치타는 분명 세계적인 컨스트럭터가 만든 스포츠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차를 한국의 도로 상황에서 끌고 다니려다 보니 무리가 따랐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속도를 낼만하면 차량의 흐름에 막히고 차량의 흐름을 풀렸다 싶어 속도를 붙이면 속도가 올라갈 사이도 없이 다시 막히는 그런 과정을 반복한데다가 불필요하게 자주 엑셀과 억센 브레이크를 얕게 밟는 과정에서 차의 엔진은 그런 패턴에 길들여진 듯했다. 차는 주인의 운전습관에 길들여지면서 시속 340km까지 나갈 수 있는 속도를 잊어가는 중이었다.

치타, 잘 달렸어.
기성은 마음으로 차에게 말을 걸었다.

차에게 말을 걸고 쓰다듬고 사랑을 줘봐. 그럼 차도 네 마음에 답을 해줄 테니까. 카트 경기장에서 잡일을 하던 시절 매니저가 한 어린 카트 선수에게 해줬던 말이었다. 모든 사물에 정이 있다는 말도 기억났다. 기계로만 대하면 기계 이상의 가치를 얻을 수 없다는 말도. 하지만 그 어린 선수를 매니저의 말에 피식거리기만 했다. 선수의 부모는 주제넘은 충고라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기성은 자신이 운전대를 잡았던 모든 차에게 말을 걸었다. 운전대를 쓰다듬고 보닛을 가볍게 두들겨주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기성에게 오는 차들은 스스로 아픈 곳을 내보였다. 죽는 날까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차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순간, 기성은 행복했다.

긴 곡선도로가 나타났다. 곡선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로를 달리던 차들의 차폭등이 곡선 끝에서 한순간에 사라졌다. 도로가 규정한 속도로 달리면 속도를 줄이지 않아도 곡선도로를 통과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지만 시속 300km이 넘는 속도에서 커브 길은 위험했다. 하지만 기성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무심한 척 느긋한 척 조수석에 앉아 있던 수인은 다시 긴장해서 두 손으로 안전벨트를 거머쥔 채 몸을 시트에 바짝 붙였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포인트를 지나쳤다. 기성의 의도였다. 차가 바깥 차선 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기성은 빠르게 엑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았다. 속도를 붙인 그대로 브레이크 포인트를 지나 곡선도로를 빠져나가는 기술이었다. 마지막 점검이었다. 곡선 도로에서 직선 도로로 접어든 후 수인은 맥이 풀린 듯 안전벨트를 쥐었던 손을 무릎 위로 힘없이 내려놓았다. 기성은 차의 속도를 빠르게 줄였다. 사라졌던 풍경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기성은 치타를 서평택 톨게이트로 진입시켰다. 몸을 꽉 채웠던 꿈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지불하고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치타를 유턴 시킨 다음 고속도로 진입 도로 위에 올려놓은 후 차를 세웠다.

“앞으론 그런 밀림 현상은 없을 겁니다.”

기성은 차를 멈춘 후 수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기성과 수인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난 거죠?”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인 겁니다.”

기성은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수인도 차에서 내렸다. 기성은 수인을 의식하지 않은 채 치타의 지붕을 쓰다듬었다. 잘 달려온 사실에 대해 보상이라도 하듯이. 수인이 다가서자 기성은 그녀에게 자동차 키를 넘겼다.

“올라갈 땐 제가 하나요?”

“이젠 제대로 길이 들었으니까요.”

기성은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브레이크 밟을 때 깊이 밟을 수 있도록 시트를 조정해서 약간 당겨 앉으세요. 그리고 다른 차들과 달리 치타는, 아니 이 차를 운행할 때는 조금 더 빨리 판단해야 합니다. 브레이크를 잡을 건지 아니면 엑셀을 밟을 건지. 그래야 엑셀과 브레이크를 자주 밟는 습관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했던 그런 밀림 현상은 사라질 겁니다.”

기사 이미지

수인이 시동을 걸었다. 제 주인의 발길을 느낀 것인지 치타는 부드럽게 반응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갔다. 기성은 침묵했다. 수인은 평균 250km의 속도로 차를 몰았다. 서서울 톨게이트까지 도착하는데 10분이 걸렸다. 톨게이트로 진입해 통행료를 계산하기 위해 완전히 멈춰 섰다. 돈을 지불하고 다시 엑셀을 밟았을 때 뒤로 밀리는 듯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카센터까지 도착하는 동안 신호등에 걸리거나 차량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 선 후 다시 출발할 때 수인이 말한 밀림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카센터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내렸다.

“얼마를 드리면 되죠?”

“됐습니다. 부품을 간 것도 아닌데요. 오히려 시승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제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수인은 한동안 망설였다. 그녀는 가죽 치마 주머니를 뒤져 명함 한 장을 꺼내 기성에게 내밀었다.

“제 차를 당신처럼 모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끝까지 밟아본 사람도 당신이 처음이고.”

“처음 오셨을 때 명함 받았습니다.”
수인은 더 바짝 명함을 내밀었다. 기성은 할 수 없이 명함을 받았다. SR 동호회, 카페지기 홍수인, 010-0123-3210. 거리 레이싱을 하는 동호회들이 많은가? 기성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용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감독은 우연이다. 기성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SR이 있는데 참석해 주실래요? 고문 정비사로 말이죠. 우리 동호회에서 일정의 수고비를 지불할게요.”

“거리 레이싱입니까? 제가 그런 델 가서 뭐 합니까?”

“가끔 규정을 어기고 출전하는 차들이 있어요. 현장에서 차가 고장 나는 수도 있고요. 참여하시는 거죠? 꼭 정비사가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당신이라면 고정 레이서로도 환영이니까요.”

“전 레이싱엔 관심 없습니다.”

기성의 말에 수인이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기성은 그녀의 눈길을 피한 후 치타를 내려다보았다. 고르게 숨을 쉬고 있는 치타의 지붕은 도시의 가로등과 네온 불빛을 뒤집어쓰고 앉아 반짝거렸다. 두 가지 유혹이 기성의 마음을 흔들었다. 치타의 여주인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과 어쩌면 치타를 몰고 거리를 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어지간한 남자들은 시속 250에서도 벌벌 떨어요.”

그의 마음이 참여하겠다고 기운 건 치타 때문이었다. 자신감으로 꽉 찬 치타. 치타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리며 기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회원이 많나요?”
기성이 인사치레로 물었다.

“오늘까지 가입한 회원 수가 3,677명이에요. 그중에 삼 분의 일은 한 번쯤 레이싱에 참여를 했죠.”
프론트를 어루만지고 있는 기성에게 수인이 말했다. 기성은 그녀가 말한 숫자에 적잖이 놀랐다. 그렇게 많은 인간들이 속도에 열광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치타를 몰고 다닌다면 충분히 열광할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정이 있어요. 배기량 2,000cc 아래의 차만 등록이 가능해요.”

“하지만 이 차는···.”

“이건 그냥 제가 몰고 다니는 차예요. 제가 레이싱에 참여할 땐 저 역시 2,000cc 아래의 차를 몰고 나가요. 언제든 환영할게요. 제가 회원 가입을 권유한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수인의 말이 목을 휘감는 듯했다. 기성은 치타의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손을 얼른 내렸다. 그는 수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곁문을 통해 카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 이미지


작가 소개
· 추계예술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 상명대 대학원 소설 창작학과 재학 중
· 2012년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

그 외의 작품
·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불의 기억’
· ‘13월’
· ‘9일의 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