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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거부와 세계 양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재일 한교의 지문날인 문제를 놓고 다시 한일간에 시비가 일고 있다.
여기에 세계의 양심을 대변하는 각국의 지식인과 인사들이 가세하여 일본정부의 비인도적 처사를 규탄하고 있다. 이웃한 한일양국 모두에 결코 유쾌한 일은 못된다.
우리는 일본검찰이 유학중인 한국 시인 김명식씨를 지문날인 거부를 이유로 강제 추방키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깊은 충격과 함께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지문채취의 법적 근거가 되는 일본의「외국인 등록 법」이야말로 비인도적·민족 차별적이며 세계의 국제화 추세에 반역되는 낡은 악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내 외국인의 차별 없이 한번만 지문을 찍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 인에겐 지문채취를 안 하면서도 외국인에 대해서는 잠재적 범인으로 취급, 5년마다 지문을 찍도록 강제하고 있다.
지문날인을 의무화하고 처벌조항까지 둔 강제규정은 국제인권규정에도 명백히 위배되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조항을 담고 있는 일본 헌법정신에도 어긋나는 조항이다.
이는 이번 사건이 문제되자 일본 법조계가 정부에 반발하고 대학교수 88명이 법치주의에 위배된다며 일본 법무성과 외무성에 시정을 촉구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더구나 3백 개에 가까운 일본 지방자치단체가 이 제도의 철폐를 강력히 요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문채취는 범행을 저지른 형사피의자나 장차 범죄를 일으킬 우려 또는 소지가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예비적 범죄자 또는 잠재적 범인을 대상으로 하는 지문채취를 외국인에게만 행한다면 감정이 좋을 수가 없을 것이고 위헌성과 인권 유린이란 논란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비록 지문날인이 모든 외국인에게 적용되는 법률이라고는 하나 재일 외국인의 85%가 우리 동포다.
더구나 우리 재일 동포들은 일본의 전쟁수행 목적을 위해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다.
당시 일제는「내선일체」, 「일시동인」운운하면서 우리 청장년들을 강제 동원하여 전쟁터에 밀어 넣었다가 패전하자 이들을 헌신짝 버리듯 했다. 게다가 차별적 대우와 학대마저 주저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과 같은 국제법규들은 우리교포와 같은 전쟁피해자들에 대해「주소지국 국적선택권과 그 취득 권」을 엄연히 보장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프랑스는 알제리인, 독일은 폴란드인, 이탈리아는 이디오피아인, 영국은 인도인에 대해 국적을 부여하고 자국인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전시엔 우리교포들에게 「황국신민」이라 하여 일본국적을 주었다가 패전 후엔 이를 박탈하여 외국인으로 취급해 왔다.
그 때문에 재일 동포들은 납세를 포함하여 일본이 부과하는 모든 의무를 이행하면서도 취업의 기회가 제한되고 공직취임이 거부되고 있다. 취업됐다 해도 연금혜택을 못 받고 있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세계적 양심의 규탄에 귀를 기울여 김명식씨를 추방하려는 부당한 결정을 즉각 취소하고「외국인 등록 법」의 독소조항을 삭제해야 한다.
이런 조치가 없다면 전대통령 방일시의 약속에 대한 배반이요, 일본태자의 방한을 무의미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 일본이 경제대국의 수준에 맞는 정신문화를 갖춰 인류공존의 대도에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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