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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국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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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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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부장·라이프스타일 데스크

단돈 80달러(약 9만원). 2010년 할리우드에서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들어간 돈 전부다. 그리고 창업한 지 불과 4년 만인 2014년 말 글로벌 화장품 기업 에스티로더 그룹에 의해 무려 2억 달러(약 2234억원·월가 추정치)에 인수된다. 뷰티 스타트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미국 스킨케어 화장품 브랜드 글램글로우의 창업자 글랜(43)과 섀넌 델라모어(41) 부부 얘기다.

최근 한국을 다녀간 이 부부의 성공스토리는 믿기 어려울 만큼 동화 같아서 혹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다. 하지만 알고 보니 헬스클럽 매니저 출신의 흑인 남성, 그리고 로펌 법률보조원을 하던 백인 여성일 뿐이었다. 할리우드라는 지역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유명 연예인들이 자발적으로 입소문을 내게 한 게 물론 주효했지만, 금수저이기는커녕 오히려 마이너리티(흑인과 여성)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일궈낸 성공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성공 요소를 하나 더 꼽으라면 오로지 제품으로만 브랜드의 가치를 평가하고 성장을 독려하는 거대 기업의 상생 노력과 도덕성이 아닐까 싶다. 글램글로우를 인수한 에스티로더는 “제품을 만든 사람이 더욱 매력적”이라며 거액을 들여 회사를 인수한 후에도 창업자 부부가 계속 경영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글로벌 기업에 편입된 후에도 스타트업 같은 혁신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고, 지속적인 매출 성장의 발판이 됐다.

사실 이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럭셔리 백화점 체인 니만마커스의 선택이다.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조잡한 플라스틱 용기에 화장품을 담아 팔던 이들 부부에게 먼저 백화점 입점을 제안하며 번듯한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준 게 바로 니만마커스이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까다롭게 입점업체를 고르기로 유명한 영국 해러즈 백화점을 비롯해 전 세계 80여 개국에 진출한 글로벌 브랜드로 클 수 있었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이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인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떠오른다. 제품 품질과 브랜드 경쟁력을 키우는 대신 불법 도박과 전방위 로비로 감옥살이를 하는 뷰티업체 대표, 그리고 면세점 입점을 대가로 뒷돈을 받은 유통업체 오너 말이다.

미국이 부럽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노력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굳이 부정한 인맥을 쌓지 않아도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끊임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안혜리 부장·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