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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전쟁·가난의 상흔 … 1차 개혁은 성공, 2차는 실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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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18면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세 차례의 통화조치가 있었다. 모두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28일 단행된 1차 통화조치는 일제의 잔재인 구권(조선은행권)과 새 화폐인 신권(한국은행권)을 1대 1로 바꾸는 조치였다. 화폐로만 보면 국권을 되찾은 일이지만, 8·28조치에는 통한의 역사가 서려 있다.


해방 전후 한반도에는 돈이 넘쳤다. 가난에 찌든 서민들과는 하등 상관없는 돈이었다. 해방 직전 일제는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조선은행권을 마구 찍어냈다. 『한국은행 100년사』에 따르면 1943년 14억6000만원이던 조선은행권 발행액은 일제 패망 직전인 45년 6월에 43억3000만원으로 세 배가량 증가했다. 해방 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군정 하에서 돈이 부족했던 남한 정부는 조선은행권 발행을 더욱 늘렸다. 한국경제는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에 시달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45년 서울 도매물가상승률은 576%, 46년 576%, 47년 198%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1차 통화조치에 나선 결정적 이유는 고물가가 아니었다. 북한 인민군은 남침 나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국은행을 장악했다. 당시 원효로 한국은행 건물에는 20억원의 미발행 현찰이 남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화폐 제조기 원판이었다. 북한은 탈취한 돈과 화폐제조기로 찍어낸 돈을 유통시켰다. 경제를 교란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 정부는 결국 돈을 바꾸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단기간에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두 해를 넘겼다.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돈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풀렸다. 결국 한국 정부는 비밀리에 화폐개혁 작업에 착수해 53년 2월 15일 2차 통화조치(사실상 1차 화폐개혁)를 발표했다. 기존 ‘원’ 표시 한국은행권과 ‘전’ 표시 조선은행권를 포함한 모든 구화폐의 유통을 일체 금지하고, 이를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환’ 표시 은행권과 100대 1 비율로 교환하는 것이 골자였다. 타의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당시 정부는 1인당 최대 500환까지만 신권으로 교환해 주고, 나머지는 강제로 1~3년짜리 정기예금이나 국채 예금에 맡기게 했다. 장롱 속에 묵혀 있던 돈을 끄집어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이 조치로 유엔군은 전쟁 대여금 6억8000만 달러를 상환했다. 이 돈은 전후 복구자금으로 쓰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6·10 화폐개혁 단행 두 달 후인 1962년 8월 새나라자동차 준공식에 참석했다. [중앙포토]

62년 6월 10일에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주도로 돈의 액면 단위를 10분의 1로 바꾸는 한국의 마지막 리디노미네이션이 단행된다. 당시 물가상승률은 10%대였다. 화폐개혁을 할 만큼 심각한 인플레이션 상황은 아니었다. 목적은 따로 있었다. 경제 개발을 위해 지하자금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걸림돌이 있었다. 당시 한국은 화폐개혁을 준비하면서 미국과 어떠한 협의도 하지 않았다. 미국은 크게 반발했고, 결국 예금 동결 조치를 골자로 한 2차 긴급조치는 백지화됐다. 2차 화폐개혁은 애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화폐 단위를 10분의 1로 바꾼 흔적만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다.


김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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