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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좇은 ‘니트의 여왕’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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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6 면

“그는 자유로운 여성이자, 자신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개척자였습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트위터)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여든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에 대해 전세계 패션계가 애도 분위기다. 크리스티앙 라크르와는 “소니아 리키엘은 한 특정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그 자체로) 유혹이자, 파리였으며, 스타일이었다”며 경의를 표했다. 장 폴 고티에와 샤를 드 카스텔 바작은 각각 ‘혁명적 디자이너’ ‘패션계의 선지자’라는 말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유족 측은 이날 “파킨슨병을 앓아온 그가 오전 자택에서 영원히 잠들었다”고 밝혔다. 리키엘은 15년이나 숨겨온 지병을 2012년 공개한 이후 공개석상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레드 헤어, 창백한 얼굴, 가녀린 몸이 드러나는 검정 의상이라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를 우리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실제로 리키엘은 샤넬을 잇는 여성복의 혁명가로 비유되곤 했다. 여성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주는 옷, 그것이 리키엘의 디자인 철학이었다. 패션에 뛰어든 계기부터가 그랬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해 임신한 그는 편안하면서도 패서너블한 임부복을 찾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직접 만들게 된 것이다. 배부른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니트 드레스가 그 결과물이었다. 이를 두고 그는 1987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옷이 바로 나였고, 가장 섹시하고 파워풀하지 않았느냐”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리키엘은 패션으로서 페미니즘을 풀어가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62년 선보인 대표 아이템인 ‘푸어 보이 스웨터(poor boy sweater: 몸에 꼭 끼는 골지게 짠 스웨터)’ 역시 그랬다. 가로 세로로 너무 타이트해서 마치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입어 보면 부드럽게 몸에 감기는 착용감이 탁월했다. 게다가 그는 ‘스웨터를 입고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라’는 도발적인 조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니트는 거칠고 투박한 소재에 펑퍼짐한 실루엣이 주류를 이뤘다. 이런 연유로 리키엘은 60년대 동시대를 살았던 메리 퀀트(미니스커트를 히트시킨 런던 디자이너)와 더불어 여성 패션의 새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되곤 했다. 돌이켜보면 68년 문을 연 그의 첫 매장이 파리 그레넬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도 우연은 아니었지 싶다. 그곳은 당시 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구호를 외치던 시위의 현장이었다.


오래전부터 패션계는 그에게 ‘니트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과찬도 과장도 아닌 수식이다. 데뷔 이후 그가 선보인 니트 디자인만 6000여 개. 어느 것 하나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기본 니트 스웨터에 화려한 문구나 프린트를 더 한 옷은 당시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무지개 컬러 줄무늬나 물방울 무늬는 물론이고 솔기와 봉제선을 밖으로 드러낸 디테일은 혁명에 가까웠다. 오드리 헵번이나 카트린느 드느브 같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즐겨 찾는 아이템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무모한 도전은 예술문화훈장, 레종 도뇌르 훈장으로 충분한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다.


생전에 리키엘은 “여자들이 내가 만든 옷을 입고 행복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종종 드러내고는 했다. 아마도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자신처럼,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옷을 입고 더 자유로운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사진 소니아리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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