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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과학소설’에서 영감을 얻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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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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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논설위원

‘정치과학소설(political science fiction)’은 정치과학(political science)과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의 합성어다. 정치는 기예(技藝)일지는 몰라도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는 하버드대 정치학과(Department of Government)의 입장에서는 ‘가버먼트 소설(government fiction)’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개헌 주장에 나오는 정체들도 모두 과거의 산물
비전이라는 이름의 ‘과학적 공상’에 미래 돌파구

미국에는 ‘정치과학소설’을 정규 과목으로 개설한 대학도 있다. 그 강의의 목표는 정치과학소설에서 오늘의 정치를 독해해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는 것이다. 주류 사회과학이나 철학이 할 수 없는 기능을 정치과학소설이 수행하는 점에 착안한 과목이다. 학점을 받기 위해 읽어야 할 정치과학소설에는 예컨대 이런 게 있다. 투표하는 날이다. 그 나라 그 시대에서는 선거를 딱 한 명의 개인이 한다. 전체 유권자를 대표해 단 한 명의 유권자가 투표한다. 컴퓨터가 유권자로서 가장 적합한 한 명을 선정한다.

‘미국 사람들도 참 실없는 사람들이군’이라는 반응도 나올 수 있겠지만 허다한 병리적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런 ‘안 해 볼 이유 없잖아?’하는 ‘와이낫(Why not)’ 정신이 아닐까. 실리콘밸리의 힘은 환상·망상·공상·상상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렇다. 소설은 허구다. 하지만 허구에는 미래를 제시하는 힘이 있다. 말이 씨가 되듯, 상상도 씨가 된다. 일종의 과학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영국 정치가 토머스 모어(1478~1535)의 『유토피아』(1516)에는 재산을 공유하는 정체(政體)가 나온다. 참담한 결과를 낳았지만 20세기 공산주의는 이를 실제로 실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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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50)은 『1984』(1949)에서 당시 이미 시작된 전체주의 경향이 미래에 심화될 가능성을 경고했다. 1984년까지 전체주의 사회가 도래하지 않은 이유는 오웰의 경고도 한몫했다. 마르크스(1818~1883)의 사상 또한 미래 사회주의 사회를 그린 ‘정치과학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오웰과 마르크스는 ‘역설적’으로 전체주의가 도래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는 길을 제시했다.

정치과학소설은 결국 크게는 두 종류다. 디스토피아 아니면 유토피아다. 디스토피아는 ‘정치 지옥’이다. 유토피아는 ‘정치 천국’이다. 정치과학소설은 인류의 미래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고 최상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는 선택의 스펙트럼을 제시한다. 인공지능(AI)이 수행하는 전면적인 ‘민간인 사찰’ 덕분에 범죄가 사라지고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AI가 지배하는 세상을 그린 정치과학소설들이 그런 가능성에 대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치과학소설은 이런 현실적 효용성 외에도 일단 재미가 있다. 『유토피아』 『1984』는 풍자소설이다. 풍자는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 따위를 빗대어 비웃으면서 씀”이다. 정치과학소설에는 씁쓸할 고급 유머가 담겼다.

요즘 우리 신문들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고도 씁쓸하면서도 ‘웃픈’ 기사들로 넘친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영감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정치과학소설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한국형 정치과학소설을 써야 한다. 이런 정치과학 소설은 어떨까. 2017년 8월 15일 남북한 지도자가 미국 워싱턴에서 만난다.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켜보는 남북 정상이 핵 폐기와 통일 청사진을 발표한다.

한데 과학소설의 구성 요소로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는 없는 뭔가가 등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제일 만만하게 쉬운 것은 타임머신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2200년의 세상은 대한민국이 주도한다. 세계의 정치경제 이념은 ‘홍익인간주의(弘益人間主義)’다. 우리 후손들이 남북통일을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그린 정치과학소설도 필요하다. 정치권의 끝없는 비생산적인 정쟁이 궁극적인 원인이 돼 중국의 한 지방이 돼버린 북한, 핵전쟁 이후 사람이 살지 않게 됐거나 수렵채집 사회로 돌아간 우리 땅을 그리는 정치과학소설 말이다.)

답답하고 꽉 막힌 세상이다. 우리에게는 뭔가 통쾌한, ‘으하하하’ 하며 온 국민이 큰 소리로 웃을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하다. 중임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어쩌고 하는 개헌 논의가 들락날락하지만 이들 정체는 결국 모두 과거의 산물이다. 한편 크게는 이승만·박정희 캠프, 김대중·노무현 캠프로 나뉘어 시시콜콜한 것까지 끝없이 따지고 있다. 과거에 머물면 미래가 없다. 우리의 미래가 잘되면 100년 후 200년 후의 모든 세상 사람들이 이 네 분 ‘대한민국 건국의 대통령들’에 대해 역사 시간에 배우게 될 것이다.

비전은 상상이다. 상상은 미래를 미리 보게 해준다. 비전은 과학적, 적어도 논리적인 공상이다. 정치과학소설적 상상력이 있는 지도자들만이 우리 민족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정치과학소설을 허투루 볼 수 없는 이유다. 학문이 할 수 있는 일, 언론이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소설이 좋은 대안이다.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