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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핑크타이드의 몰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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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중앙포토]

브라질의 첫 여성 대통령이었던 지우마 호세프(68)가 의회의 탄핵으로 물러난 것은 브라질 정치사에서 일대 사건이다. 이로써 노동자 출신의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화려하게 열린 브라질의 좌파정권은 13년 만에 막을 내렸다. 호세프의 남은 임기를 채우게 될 미셰우 테메르 대통령은 중도우파다.

시야를 중남미 전체로 넓혀보면 보다 큰 그림이 보인다. 이른바 ‘핑크 타이드(Pink Tide)로 불리는 온건 사회주의 성향 좌파 시대의 종언이다. 핑크 타이드는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 우고 차베스가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브라질(2002년), 아르헨티나(2003년), 우루과이(2004년), 칠레ㆍ볼리비아(2006년) 등에서 좌파 정권이 탄생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남미 대륙 12개국 가운데 콜롬비아와 파라과이를 제외한 10개국 정권이 좌파였다. 남미 인구 3억6500만 명중 3억 명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정치지형의 변화가 일어났다.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친기업 성향의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승리하며 12년간의 좌파 부부 대통령(네스토르 키르츠네르-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차베스가 철권통치를 과시했던 베네수엘라 총선에선 중도 보수의 야권연대가 의석의 3분의2 이상을 가져가는 파란을 일으켰다. 페루에서도 세계은행 경제학자 출신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대통령이 탄생했다. 브라질에서 벌어진 호세프 탄핵도 이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손혜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중남미의 정치적 균형추가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남미 좌파정권들의 도미노같은 연쇄 몰락을 경제 실정과 부패의 합작품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브라질처럼 마이너스 성장과 대규모 부패 스캔들이 겹치면 어떤 정권도 유지되기 어렵다.

흥미로운 점은 핑크타이드의 흥망이 대략 지난 10년간 지구촌을 강타한 원자재 붐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부상하던 중국이 블랙홀처럼 원자재를 빨아들이자 남미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좌파정권들은 넘쳐나는 돈을 빈곤층 지원 등 복지지출에 썼다. 베네수엘라에선 차베스 집권 15년간 빈민층에게 교육과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선 정부 보조금으로 중산층으로 편입하는 이들이 대거 생겨났다.

하지만 돈을 나눠주기만 했을 뿐,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경제 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2013년 이후 하루아침에 원자재 붐이 식자 대반전이 일어났다. 남미 국가들 상당수가 글로벌 시장에 팔 게 별로 없었다. 베네수엘라에선 수출의 98%가 석유 등 원자재다. 원자재 의존도가 높기는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에콰도르 86%, 아르헨티나 70% 등이다. 남미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경기 급랭으로 세수가 줄면서 정부 재정에 구멍이 생겨났다. 브라질 예산의 적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9.3%, 베네수엘라는 21.3%나 된다.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고는 300억 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정부 주머니에 돈이 마르자 사회 보장 지출도 쪼그라들었다. 정부 지원금에 익숙하던 시민들의 불만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돈이 떨어지면 포퓰리즘도 끝”(마샤 라고스 칠레 여론조사기관 대표)인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중남미 핑크타이드의 비극은 “비올 때를 대비해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다"(호르헤 카스타네다 전 멕시코 외무장관)는 것이다. 손혜현 교수는 “재정이 나빠지기 전에 성장 중심의 구조개혁을 했어야 하는데 남미의 좌파정부가 그걸 하지 못하면서 민심을 잃게 됐다”고 말했다.

지구 반대편 남미의 핑크타이드 몰락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정부의 이념이 어떻든 현실 문제를 극복할 개혁에 실패하면 민심이 등을 돌린다는 사실이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서울=백민정 기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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