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강남인류] 배트맨? 베트멍! 파리의 젊은 브랜드, 거침 없는 파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요즘 패션계 최고의 뉴스 메이커를 꼽으라면 단연 ‘베트멍(vetements, 불어로 ‘옷’)’이다. 2014년 파리의 디자이너 7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이 브랜드는 벌이는 일마다 화제다. 택배업체 DHL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샛노란 티셔츠 하나에 무려 330달러(약 33만 6000원)라는 믿지 못할 가격을 매기는 것도 모자라 완판까지 시키는 이변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알 만한 ‘베트멍표 디자인’으로 톱스타와 스타일리스트·바이어를 사로잡아, 옷을 만들기도 전에 주문이 마감되는 일도 허다하다. 화룡점정을 찍듯, 지난해에는 대표 디자이너인 뎀나 바잘리아(35·Demma Gvasalia)가 패션 하우스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됐다. 패션 동네에선 이들을 두고 ‘창조적 지각 변동’ 혹은 ‘새로운 세대의 역습’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베트멍, 대체 무엇이 얼마나 다르길래-.

기사 이미지

오버사이즈, 해체와 재조합, 패치워크로 요약되는 베트멍의 디자인은 언제나 파격적이다. 소매나 어깨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은 물론이고 패딩·데님·트레이닝복처럼 정형화된 아이템도 신선하게 재해석하는 컬렉션을 선보였다.

카니예 웨스트, 지드래곤이 사랑하는 브랜드

기사 이미지

베트멍의 오버사이즈 점퍼로 공항 패션을 연출했던 지드래곤.

무엇을 해도 상상 그 이상이라는 말은 베트멍에게 꼭 어울린다. 지난달 열린 2017 봄여름 컬렉션을 보라. 런웨이를 파리 라파예트 백화점 복도로 옮긴 것 정도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이미 파리의 유명 게이바나 허름한 중국식당에서 쇼를 벌인 그들이 아닌가. 이번엔 18개의 브랜드와 한꺼번에 협업한 디자인이 쏟아져 나왔다. 단일 브랜드와의 협업은 간혹 있었지만 서너 벌씩을 각각의 브랜드와 뭉친 일은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최고급 수트 브랜드인 브리오니부터 패딩으로 대표되는 캐나다구스까지 그 협업 리스트가 어찌나 다양하고 쟁쟁한지, 그 색깔에 맞춰 허리까지 올라오는 부츠(마놀로 블라닉), 작업복 드레스(리바이스) 등 기상천외한 디자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베트멍의 쇼는 단 한 번만 봐도 무엇이 다른지를 실감한다. 일단 모델이 너무나 평범하다. 디자이너의 친구들, 인스타그램에서 인연을 맺은 진짜 ‘일반인’이 모델이다. 워킹 연습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전문 모델의 익숙한 템포보다 빠르다. ‘궁금하면 나중에 매장에 들러 또 보라’는 듯 말이다.

옷은 또 어떤가. 사람 둘은 너끈히 들어갈 듯한 넉넉한 품의 롱코트, 소매 끝이 무릎에 닿을듯한 셔츠, 거리에서 보던 그래피티가 새겨진 운동복 바지까지 주요 컬렉션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디자인이다. 이런 베트멍의 디자인이 런웨이의 눈요기감만이 아니다. 베트멍의 1140 달러짜리(127만원) 크롭트 청바지와 흡사한 물건이 H&M에 나왔을 정도로 이미 대중 패션을 파고들었으니 말이다.

또 땅을 쓸고다닐듯한 검정 레인코트나 풍성한 실루엣의 점퍼는 패셔니스타로도 유명한 가수 카니예 웨스트, 리한나, 저스틴 비버, 셀레나 고메즈 등의 스트리트 패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내에선 지드래곤이 공항 패션이나 공연 무대에서도 종종 입고 나온다.

기사 이미지

오버사이즈, 해체와 재조합, 패치워크로 요약되는 베트멍의 디자인은 언제나 파격적이다. 소매나 어깨를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은 물론이고 패딩·데님·트레이닝복처럼 정형화된 아이템도 신선하게 재해석하는 컬렉션을 선보였다.

디자이너는 ‘마틴 마르지엘라의 영적 아들’

기사 이미지

뎀나 바잘리아

베트멍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대표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다. 그는 7명의 디자이너 중 유일하게 신상을 밝힌 인물. 대중 앞에 나서서 브랜드를 알리는 일종의 대변인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력 자체가 베트멍의 DNA이기도 하다.

바잘리아는 옛 소비에트 공화국의 조지아 출신이다. 1991년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 집시처럼 7년을 지내다 독일 뒤셀도르프에 정착했다. 그는 자신의 패션 뿌리를 이같은 출신 배경에서 찾는다. 지난 2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주의 나라에서 온 가족과 친구는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다녔고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며 “뭔가 남다른 것을 찾아내고 싶은 열망과 원동력이 패션 공부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은행원을 바랬던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는 무작정 벨기에 패션학교 앤트워프에 입학 원서를 내면서 패션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방가르드 패션의 산실이자 마틴 마르지엘라-드리스 반 노튼 등을 배출한 이곳에서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을 형성해갔다.

졸업 이후 2009년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에서 선임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이 지금의 베트멍을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스스로 ‘학위 과정이나 다름없었다’고 했듯, 기존의 옷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이 패션 하우스의 컨셉트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종종 마틴 마르지엘라와 베트멍의 유사함이 입방아에 오르지만 ‘마르지엘라의 영적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라면 괜한 시비가 아닐까. 마르지엘라는 수년에 걸쳐 인정받았지만 그는 단 세 시즌만에 이뤘다는 게 다를 뿐이다.

2012년 ‘럭셔리의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어’ 루이비통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브랜드의 전·현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마크 제이콥스와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노하우를 동시에 배우는 행운을 얻는다. 그즈음 친구들과 ‘현재 패션계의 문제가 무엇일까’를 함께 고민하던 그는 자신들이 바라는 옷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주말에, 퇴근 후에 취미처럼 하던 일이었지만 바잘리아의 형이 사업성을 간파하며 쇼룸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면서 베트멍을 탄생시켰다.

남다른 패션쇼로 기존 관습을 깨다

베트멍의 ‘다름’은 옷이 아닌, 옷을 만드는 철학에 있다. 패션계의 관습과 낡은 시스템을 바꿔보는 것, 젊은 디자이너 7명이 뭉친 이유이기도 하다. 옷감 시장과 컬러 연구소, 혹은 브랜드들이 제시하는 트렌드를 따라 입는 게 옳은가를 고민하다가 ‘우리가 만들었으니 당신은 입기나 해라’가 아닌 ‘당신이 원하는 옷을 우리가 만들겠다’로 베트멍의 방향을 잡았다. 또 기존 체제도 과감히 버렸다. 예산을 가장 많이 쓰는 프리 컬렉션을 없애 패션쇼는 일년에 딱 두 번만 하고, 남녀 의상을 한 쇼에서 보여주며 비용을 줄이겠다는 것도 이들의 전략. 그 컬렉션조차 1월에 봄·여름쇼를, 6월에 가을·겨울쇼를 하는 것으로 바꿔 컬렉션이 시장에 반영되는 시차를 줄이기도 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데 대한 불안감은 없을까. 하지만 바잘리아는 올 초 잡지 ‘데이즈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의 패션계는 재미가 사라졌다. 우리는 뭔가를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싶다. 우리는 작은 브랜드이고 그래서 기존 프레임에 있지 않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옷을 사도록 하는 것이니까.”

글=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퍼스트뷰코리아·발렌시아가

※ 이번 10일을 시작으로 격주 수요일마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섹션 '강남인류(江南人流)'가 옵니다.

평소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연히 시 창작 수업 내용을 시 형식으로 정리한『이성복 시론』을 펼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시'와 '시인'이라고 쓰여진 자리에 '기사'와 '기자'를 대신 써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시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을 상정해 이렇게 조언합니다.

"모든 허물은 나에게 있다 하지요. …독자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러닝 소매에 머리를 집어넣으려는 아이나 뭐 다르겠어요. "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피상적인 사고밖에 안 나와요. …진정성을 가지고 뒤집으면, 모든 게 뒤집어져요. …시가 안 되면 나에게 뒤집음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

시도 잘 모르면서 이렇게 장황하게 시론(詩論)에 대해 늘어놓는 건 10일 독자 여러분들에게 처음 선보일 중앙일보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섹션 江南人流(강남인류)를 만든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소속 기자들의 마음가짐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언론환경을 탓하거나, 거꾸로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신문이란 무릇 이러해야 한다는 고루한 접근을 하는 대신 오로지 독자가 원하는 것을 담기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았습니다.

제호 江南人流에서 江南(강남)은 지역적 의미를 넘어 차별화한 생활 방식을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썼습니다. 결국 江南人流란 남다른 취향과 눈높이를 가진 사람들(人)을 위해 일류(一流)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담은 신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10일부터 기존의 江南通新과 번갈아가며 격주로 발행하는 江南人流, 앞으로 기대해 주십시오.

안혜리 부장·라이프스타일 데스크 ahn.hai-r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