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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포트리스(The Fortress) #3. 약탈자들 (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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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문신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낡은 장판을 건네주었다. 철조망에 몸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장판을 철조망 위에 걸치고 그 위에 담요를 덮어 씌웠다. 조심스럽게 만져본 조끼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철조망 위에 과감하게 몸을 걸쳤다.

“조, 조심해!”

쇠줄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조끼는 이미 담벼락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문신과 쇠줄은 약속이나 한 듯 대문을 향해 뛰어갔다. 잠시 후 대문 손잡이가 덜그럭거렸지만, 대문이 열리는 대신 조끼의 욕설이 들렸다.

“썅, 아무래도 너희도 담을 넘어야겠다. 안에서도 못 열게 되어 있어.”

문신이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뭐? 진짜?”

문신은 뒤로 물러나 대문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 집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집 주인 새끼가 아무래도 사이코 같아.”

대문 안쪽에서 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개소리 그만하고 얼른 넘어와. 만식이 새끼 죽은 거는 어떻게 할 건데? 친구 죽인 놈을 그냥 두자고?”

문신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집주인이 죽인 건 아니지. 파구르네 뭐네 지 혼자 주접떨다 죽은 거지. 안 그래?”

대문 사이 문틈으로 살기를 품은 조끼의 시뻘건 눈빛이 보였다. 조끼가 말했다.

“뒈질래?”

놀란 문신은 뒤로 물러섰다.

“너, 넘어가면 되잖아. 왜 화를 내고 그래.”

“빨리 넘어와라. 여기 싹 다 뒤집어 버리고 들어가게.”

원진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책과 신문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책상 아래서 꺼낸 방진케이스를 올려놓았다. 버클을 열고 뚜껑을 들어 올리자 대략 스무 개는 되어 보이는 칼들이 각자의 몸매를 뽐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으로 백화점 진열장에서 시계를 고르는 자세로 칼들을 가리키며 지나다가 끝에서 두 번째 크기의 두꺼운 칼에서 멈췄다. 칼날이 휘어 있는 쿠크리 나이프였다. 칼을 뽑아든 원진은 감각을 떠올리기 위해 허공을 향해 몇 번 휘둘렀다. 세 명을 힘들이지 않고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했다. 모니터를 보니 한 놈은 이미 정원으로 들어와 있었다. 머리가 텅텅 빈 동네 양아치로 봤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원진은 칼을 들고 뒤쪽 현관으로 향했다.

“오빠 어디가?”

“잠깐 정원에 좀 나갔다 올게.”
나가려던 원진이 생각난 듯 돌아서서 말했다.

“모니터 룸은 나 없이 혼자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알지? 민감한 장비들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또 그 놈의 잔소리. 나도 거긴 지루해서 갈 생각 없거든?”
원진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은밀하게 뒷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나섰다.

놈들이 들어와 봐야 얻어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집 창문과 문은 강철판으로 굳게 막혔고 약탈자들이 들고 온 쇠파이프로 건드려봐야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원진은 놈들이 자신의 정원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집을 건드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놈들이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정원을 망치는 일일 뿐이니까. 행여나 장미를 죽이기라도 하면 희경에게 잔소리를 듣게 되는 건 원진 자신이었다.

밖으로 나선 원진은 대문에 붙어서 밖에 있는 동료들과 말을 하고 있는 놈이었다. 계엄군의 방탄조끼를 입은 놈은 대문을 열려는 모양이었지만 열릴 리가 없었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동료들과 대화를 끝낸 조끼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약탈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요새와 같은 집이나 원진이 들고 나온 칼이 아니라 원진 그 자신이었다. 사람 죽이는 일로 먹고 산 그에게 훈련되지 않은 침입자 세 명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뒤로 돌아서는 조끼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인 원진이 휘두른 칼이었다. 쿠크리 나이프는 육중한 바람소리를 내며 조끼의 목을 단번에 날렸다. 업계 동료들이 봤다면 클린 샷이라며 손뼉을 쳐줄만한 깔끔한 솜씨였다.

원진은 쓰러지려는 조끼의 몸을 붙잡아 대문에 피가 묻지 않도록 잔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떨어져 나온 머리 역시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정원을 망치지 않도록, 공을 차듯 발로 툭툭 차서 몸뚱이 옆에 몰아두었다.

“웃샤!”

담장 안으로 누군가 뛰어내리는 소리에 원진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조끼의 피를 대문에 묻히지 않으려고 신경 쓰느라 잠시 한눈을 판 것이다.

정원에 내려선 놈이 고개를 들었다. 문신이 훤히 보이는 얇은 티셔츠를 입은 놈이었다. 원진은 곧장 놈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놈은 당황한 표정이면서도 복싱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서 칼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아래로부터 수직으로 올라온 원진의 무릎을 보지 못했다. 창처럼 솟아오르는 무릎에 턱을 정통으로 찍힌 문신은 다리가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타격을 받은 충격으로 시선이 허공으로 떠 있는 놈을 내려 보며 원진이 중얼거렸다.

“복싱 좀 한 모양이네?”
물론 원진은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지체 없이 칼을 휘둘러 놈의 목을 찌르고 심장을 찢어 놓았다. 원진은 조금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곧바로 담장을 올려보았다. 쇠줄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원진은 담장 바로 아래쪽으로 문신의 시체를 옮겨 위에서는 바로 볼 수 없도록 하고 자신도 담장에 몸을 붙였다.

“야! 거기 그냥 뛰어내리기엔 높지 않냐?”

담장 위에서 말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진은 벽에 서서 담장 위쪽에서부터 내려오는 남은 한 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위에서보니까 더 높은 것 같네. 어떻게 내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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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철조망을 막 넘어서면서도 철조망에 닿지 않는 것에 신경 쓰느라 담장 안쪽 사정까지 살필 겨를은 없어 보였다. 그는 뛰어내릴 때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담장에 매달리는 방법을 택했다. 담을 잡고 발을 서서히 아래로 내리던 그는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아래쪽을 보다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문신의 시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옆을 보니 자신을 올려보고 있는 원진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씩 웃는 원진의 미소를 보자마자 쇠줄은 미친 듯이 버둥거리며 다시 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악!”

다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지만 일단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발을 끌어올려 담장 위에 걸쳤다. 처음엔 다리 모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발목 아래가 날아가고 없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으아악!”
쇠줄이 쇼크를 받기도 전에 아직 아래쪽으로 늘어져 있는 다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놓쳐 담장 안으로 떨어진 쇠줄은 나머지 다리가 난도질이 되어 있는 것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든 원진이 쇠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때문에 청소해야 하잖아.”

원진이 가리킨 곳을 쇠줄이 멍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자신의 핏방울이 벽에 잔뜩 튀어있었다. 쇠줄은 고개를 다시 돌려 칼을 들고 설친 미친놈을 돌아보려 했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원진의 칼이 이미 끊어놨기 때문이었다. 쇠줄의 시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어둠속에 잠겨버렸다.

시체를 치우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죽이기만 했던 그였기에 뒤처리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는 것이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요새와 같은 이 대단한 집에도 시체 처리를 위한 시설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자기 집에 시체 처리 시설을 만들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인 것이다.

원진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시체들을 내려 보았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애써 가꾼 정원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 같았다. 사람 한 명의 몸에서 나오는 피의 양은 기껏해야 5리터 정도지만, 그게 모두 쏟아져 나온다면 거실 하나를 전부 더럽힐 정도의 양이었기에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원진은 시체를 한 구씩 끌고 뒷마당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긴장이 풀려서 인지, 아니면 갑자기 많이 움직여서 인지 모르지만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시체를 다 옮긴 원진은 현관 앞 세면대에서 손과 칼에 묻은 피를 대충 씻어냈다.

집안으로 들어선 원진은 배가 고파졌기에 희경부터 불렀다.

“희경아, 간식 같은 거 없어?”

원진은 칼을 수건으로 둘둘 말아 숨기고는 곧장 모니터 실로 향하며 다시 불렀다.

“희경아, 어디 있니? 내가 지금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모니터실로 들어가던 원진은 모니터 앞에 서 있는 희경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가운데 있는 가장 큰 모니터에는 정원 CCTV 화면이 보였다. 벽과 잔디에 튄 놈들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희, 희경아.”

원진의 부름에 희경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질린 희경의 얼굴은 쇼크를 받은 듯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원진이 그녀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봐, 봤어?”

원진이 희경의 팔을 붙잡으려고 하자, 희경은 마치 벌레를 피하는 것처럼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희경의 태도에 원진은 너무 놀라 멈칫했다. 희경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괴물을 피하듯 원진에게 거리를 두고 방을 빠져 나갔다.

거실에서 구토를 하는 소리에 원진이 뛰어나갔지만 희경은 몸을 비틀거리며 도망치듯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희경아, 괜찮아? 희경아, 일단 문 좀 열어봐. 내가 다 설명할게. 응?”

원진이 문을 두드리며 애원을 했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원진은 그대로 문 앞에 주저앉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원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어. 무서운 세상이잖아. 난 자기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고.”

잠시 입을 다물고 방에 귀를 기울였지만 희경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충격이 크겠지.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 특전사 출신인 거 너도 알잖아.”

울음을 참는 희경의 흐느낌이 어렴풋이 들렸다.

“이런 일이 생길까봐 모니터 룸에 못 들어가게 했던 거야.”

흐느낌 사이로 처음으로 희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원진은 문에 얼굴을 바짝 대고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응, 희경아. 듣고 있어.”

아내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직업이 뭐였어?”

원진은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회장님 개인 운전기사였잖아. 갑자기 그건 왜?”

“정말이야?”

“당연히 정말이고말고. 설마 내가 거짓말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

희경의 말이 또 다시 없어졌다. 원진이 적극적으로 말했다.

“희경아, 옛날 같았으면 당연히 날 이해할 수 없었겠지. 이해해서도 안 되고. 그런데 세상이 변했잖아. 처음엔 변종 에볼라 바이러스다 뭐다 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더니, 그 다음엔 그 병 치료제라고 먹은 신약 부작용 때문에 사람들이 미쳐서 날뛰었잖아. 뒤에서 클락숀을 빵빵거렸다고 죽이고, 추월했다고 죽이고. 정부에서는 신약 부작용인지도 모르고 폭도들이라며 계엄령을 선포하더니 미친놈이건 정상인이건 마구잡이로 잡아 죽였지. 그걸 본 시민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잖아. 군대의 횡포를 못 참겠다고 무기고를 털고 군대를 조직해서 계엄군하고 싸우고… 정상인으로 사는 게 더 이상한 세상이잖아. 안 그래?”

희경이 듣고 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흐느낌이 줄어든 걸 깨달은 원진이 말을 이었다.

“난 너만 다치지 않으면 돼. 너만 다치지 않으면 살인 아니라 더 한 것도 할 수 있어. 다른 건 몰라도 지금 내가 한 말은 믿어줘, 희경아.”

원진의 긴 얘기에도 희경의 닫힌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원진에게 남아 있는 건 집과 아내와 시간뿐이었기에 얼마든지 기다리겠다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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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중앙대학교 졸업. IT 회사 입사, 경영기획, 전략기획, 사업제휴 등의 다양한 직무 경험.
1999년 포털사이트에 <왼팔> 연재. 2001년 출간. 이후 소시오패스를 전면에 내세운 액션 스릴러 <Business is business>(2010), <유령 리스트>(2015)로 액션물 출간.

2001.08 「왼팔」
2003.03 「왼팔II」
2005.07 「적경」
2008.06 「피해의 방정식」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
2010.01 「위험한 오해」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II)
2010.10 「Business is business」
2013.11 「사이비」 (원작 : 연상호)
2014.03 「조난자들」 (원작 : 노영석)
2015.08 「유령 리스트」
2015.10 「살인의 기원」 2015 부산영화제 북투 필름 피칭작 선정
2016.04 「왼팔 rebuild」
2016.04 「블랙러시안」, 「증오」, 「복수의 미학」 (맨 헌터 태성 시리즈)
2016.05 「십이 죄」
2016.07 「세일즈 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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