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직접 돈 뿌리는 ‘헬리콥터 ECB’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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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아직까진 작은 구멍이다. 그런데 제방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엿보인다. 바로 유럽중앙은행(ECB)의 최근 회사채 매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 기업 두 곳이 ECB에 직접 회사채를 팔았다”고 21일 보도했다. WSJ은 문제가 된 회사 두 곳이 어디이고 얼마나 발행했는지는 전하지 않았다.

인플레 우려해 직접매입 막았지만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 직접 사들여
유통시장 통한 매입 아닌 사모방식
사실상 화폐화…마지막 카드인 셈

ECB의 회사채 매입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 이미 올 6월 8일부터 ECB가 회사채 매입 프로그램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양적 완화(QE)의 일부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내 기업을 돕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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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직접’ 매입했다는 점이다. WSJ는 “두 회사가 회사채를 찍어 사모방식으로 ECB에 직접 채권을 팔고 자금을 조달했다”고 했다. 사모는 사는 사람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주식이나 채권 등을 발행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채권을 발행하는 것을 공모라고 한다.

WSJ는 “두 회사가 사실상 ECB를 겨냥해 채권을 발행했다”고 했다. 사실상 ECB외 투자자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발행기업-ECB가 단독으로 만나도록 세팅된 사모방식이었던 셈이다. 양쪽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쪽은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였다.

ECB는 현재 유로존 협약상 채권을 유통시장이 아닌 발행시장에서 직접 사들일 순 없다. 독일 등 회원국 정부나 기업이 채권을 찍어 시장에 유통시킨 물량 가운데 일부를 사들여주는 게 현재 QE다. WSJ는 “ECB가 최근 회원국 국채와 회사채를 많이 매수하는 바람에 시장엔 사들일 국채가 부족한 형편”이라며 “그래서 ECB가 회사채를 사모방식으로 직접 사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실제 ECB의 자산 규모는 3조2965억 유로(약 4755조원)에 이른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전엔 1조1000억 유로 정도였다. 8년 새에 3배 가까이로 불어난 셈이다. ECB가 유로화를 찍어내 국채와 회사채를 사들인 뒤, 이 자산을 되팔아 풀린 돈을 회수하지 않아서다. 채권을 회수하면 전통적인 공개시장정책의 일부가 된다.

유로존 회원국들이 ECB의 정부나 기업 채권 직접 매입을 금지한 것은 1920년대 살인적인 독일 인플레이션 등의 교훈 때문이다. 프리드릭 미시킨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는 저서 등에서 “당시 바이마르 정부가 1차대전 전쟁 배상금을 갚기 위해 채권을 발행하면 당시 중앙은행(라이히스방크)이 ‘시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들였다”고 설명했다. 이게 바로 ‘화폐화(Monetization)’다. 또 ‘헬리콥터 머니(중앙은행의 직접 돈 살포)’의 한 형태다.

전 미 Fed 의장인 벤 버냉키는 최근 일본은행(BOJ) 고위 인사들을 만나 “화폐화나 만기가 없는 국채(영구채) 발행 등을 도입할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아베노믹스 3년에도 경기 회복과 디플레이션 퇴치가 쉽지 않아서다. 달리 말해 화폐화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인 셈이다.

이런 배경에 비춰볼 때 ECB의 회사채 직접 매입은 의미심장한 징조다. 20년대 직접 매입과는 좀 다른 ‘사모방식’이기는 하지만 WSJ가 표현한 대로 “ECB가 직접 회사채를 사들였다”. ECB는“사모방식을 통해 시장을 거쳤다”고 핑계댈 순 있다. 하지만 내용상 헬리콥터 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일본 등이 자국 중앙은행법을 우회해 화폐화를 할 수 있는 기법을 ECB가 선 보인 것이다. 제방에 작은 구멍이 뚫린 셈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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