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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딜레마|최상룡<고려대 교수·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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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망스러운 정치적 규범을 말한다면 평화·정의·민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보편적 가치로서의 평화·정의·민주가 한국의 특수한 사정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들 추상적 원리가 우리 국민의 생활 실감 속에 뿌리내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나는 아직도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딜레마로 남아 있는 세 가지 정치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째는 통일과 평화공존의 딜레마다. 통일은 6천만 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이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남-북한 당국도 언필칭 조국의 평화통일을 말하고 있고, 공존이라는 말은 분단의 고정화라는 어감을 주기 때문인지 가능하다면 피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좀 냉정히 역사적 현실을 직시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자문을 한번쯤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지금까지 제기되어 온 남-북 양쪽의 통일론이 우리민족의 통일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는가? 우리국민 가운데 과연 몇%가 예견할 수 있는 가까운 장래에 통일이 된다고 보는가? 그리고 남-북한 당국이 평화통일이나 평화공존을 위해 얼마나 진지한 노력을 해 왔는가?
전후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전쟁에 의한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과 독일의 평화공존이 좋은 교훈이 된다. 그런데 한반도의 통일론은 그것이 남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이든, 북의 연방제든 어느 것이 합리적이냐 하는 논리성의 경쟁이지, 어느 것이 더 실현 가능하냐 하는 현실성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일방이 타방의 통일 방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면과제로서 추진해야 할 통일정책은 우리 현실에 맞는 평화공존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 것이라야 한다. 평화공존은 통일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지상과제인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이다.
지금과 같은 비평화적=적대적 공존 하에서 말하는 통일의 주장은 그 현실성에 대한 공감이 작기 때문에 자칫 공허한 수사가 되기 쉽다.
둘째, 성장과 분배의 딜레마다. 우리는 70년대 이래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그 성장이 가지는 사회·정치적 의미를 자각할 겨를도 없이 마구 달려왔다.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풍요의 외화는 맛보게 되었으나 반면 그 내실에 있어서 그야말로 역사상 가장 첨예한 격차 감, 상대적 박탈 감을 느끼게 된 것도 사실이다.
요즈음 한국에서 빈부격차의 실감은 이미 통계숫자로 정당화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상태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몇몇 세계적 규모의 기업이 등장한 반면, 전태일·박영진씨의 분신자살은 한마디로 성장의 경리와 분배의 비 참을 말해 주는 단적인 예다. 더욱이 우리국민 특유의 평등주의에 대한 강인한 욕구를 감안한다면 적어도 생존이 어려워 자살할 정도의 극한상황은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할 것이며 단순한 빈곤의식이 투쟁적인 계급의식으로 급진 화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장을 통한 분배에서 분배를 통한 안정에로의 이행전략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만약 이 과제를 소홀히 한다면 그 어떤 정치세력도 정의사회의 이니셔티브를 쥘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안보와 민주의 딜레마다. 60년대이래 우리는 국가안보 제1주의를 내세워 개인의 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2차적인 것으로 돌려 왔다. 싸울 의지와 능력을 같이 갖고 있는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안보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코 안보가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참다운 의미의 안보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해 나라를 지키는 것뿐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도전을 흡수하여 국민의 자발적인 지지기반을 확충하는 것이다.
전자를 위해 군사력이 있어야 하고 후자를 위해 민주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전선에서 침략자를 막고 있는 국군장병을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고, 이 나라에 민주정치의 꽃을 피울 지도자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의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구미나 일본의 눈으로 냉소만 하고 있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북한보다는 낫다고 자족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보와 민주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모순관계가 아니며 권위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야말로 안보의 가장 튼튼한 담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세 가지 정치과제, 즉 궁극목표인 평화통일에 앞서 가능한 평화적 공존의 환경을 조성하는 일, 외형의 성장위주보다 배분적 정의의 실현으로 빈부격차를 줄이는 일, 그리고 민주적 안보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는 일로 일대 방향전환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부닥친 도전과 딜레마를 과감하게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시간을 다투는 최우선 순위의 당면과제는 민주화다. 이제 민주화가 스쳐 가는 바람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시대정신 (Zeitgeist)으로 우리 앞에 육박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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