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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 분식 못 걸러낸 안진 ‘부실감사 책임’ 인정될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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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호 12면

대우조선해양의 5조4000억원대 분식회계로 인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주주들의 소장이 법원에 잇따라 접수되고 있다. 6월 말 김모씨 등 ‘개미투자자’ 118명이 소송을 낸 이래 국민연금공단, 사학연금공단 등 기관투자가들이 가세하면서 지난달 말까지 서울중앙지법에 접수된 소송은 모두 8건이다. 총 청구금액은 877억원에 달한다.


원고들은 모두 대우조선의 전·현직 이사들과 안진회계법인(이하 안진)을 피고로 지목했다. 부실감사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대우조선의 외부 회계감사를 맡았던 안진은 분식회계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2012~2014년 재무제표에 대해 모두 ‘적정’ 의견을 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소송이 어느 정도로 확대될 것인지와 안진에 대한 법적 책임 인정 여부를 주목하고 있다. 소송 진행 중에 대우조선이 상장 폐지와 파산 절차에 이를 경우 지불 능력이 제한돼 결국 안진만 손해배상을 감당하게 될 수도 있다.


2012년 저축은행 파산 사태 이후 회계법인의 부실감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송은 급증했다. 지난해 1월~올해 6월 서울고법에서 선고된 35건의 회계법인 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분석해 대우조선 관련 소송 사태를 전망해 봤다.


35건 중 21건은 2009년 부산저축은행, 솔로몬저축은행 등이 발행한 후순위 무보증 사채를 산 투자자들이 제기한 소송이었다. 6건은 환경플랜트 업체 신텍(현 한솔신텍)의 주주들이, 4건은 ‘분식회계→부실감사→상장 폐지→파산’으로 이어진 코스닥 상장업체들의 주주들이 낸 소송이었다. 나머지 한 건은 에이스저축은행 정기예금 가입자, 한 건은 제일저축은행의 주주가 낸 소송이었다. 모두 거래하거나 투자한 기업이 파산하면서 손해를 본 주주나 채권자들이 “회계법인들이 낸 감사보고서를 믿어 손해를 봤다”며 제기한 소송이다. 하지만 손해배상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원고의 청구가 인용된 사건은 저축은행 관련 4건, 신텍 관련 6건, 자유투어 등 코스닥 상장사 관련 2건이 전부였다. 회계법인을 상대로 낸 나머지 피해자들의 청구는 모두 기각됐다.


청구가 받아들여진 사건들은 대부분 검찰 수사나 증권선물위원회의 감리 과정에서 회계법인(또는 소속 회계사)이 분식회계를 찾아내지 못한 데 과실이 있다거나 분식회계 자체를 회사 측과 공모한 사실이 드러나 형사처벌이나 행정제재를 받은 경우였다. 민사소송은 이와는 법적으로 별개임에도 형사처벌이나 행정제재가 사실상 손해배상의 전제 조건처럼 작용했다.


손해배상 소송에서 드러난 증거만으로 회계법인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은 1건뿐이었다. ‘분식회계는 했다. 감사보고서의 내용도 거짓이다. 그렇다 해도 이것이 회계법인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는 결론에 도달한 판결이 다수였다. 청구를 받아들인 경우에도 법원은 회계법인의 책임을 청구금액의 30% 이하로 제한했다.


회계법인에서 손해를 배상받기 어려운 이유는 부실감사가 회계사의 과실 때문이라는 점과 손해가 부실한 감사보고서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투자자가 입증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투자자가 책임을 묻는 근거 법률로 자본시장법, 주식회사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민법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재판 양상은 달라지지만 어떤 경우든 회계법인의 과실이 인정되느냐가 승패의 핵심이 된다.


법무법인 한누리의 김주영 변호사는 “피고 회사나 회계법인 측 자료는 물론 금융감독기관의 감리 결과도 법정에 제출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미국처럼 쌍방이 보유한 증거의 제출을 강제하는 시스템도 없어 쉽지 않은 소송”이라고 말했다. 판사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힌 ‘자기책임의 원칙’ 또는 ‘손해의 공평 분담 원칙’이 투자자에게 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최근 분식회계 관련 소송을 맡았던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기본적으로 투자 위험은 투자자 본인의 몫이다. 회계법인에 잘못이 있어도 절대 책임은 50%를 넘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우조선 관련 소송은 2000년 10월~2008년 9월에 진행된 대우전자 분식회계 소송과 닮았다. 개미투자자들이 회계법인의 부실감사 책임을 추궁해 약 100억원의 손해배상을 받아낸 소송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안진에 60%의 책임을 인정했다.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대우전자의 분식회계 규모는 11조7000억원(대우그룹 전체는 약 50조원)이었다. 조 단위의 분식회계에 ‘적정’ 의견을 낸 회계법인이 모두 안진이라는 것, 개미들의 소송을 주도하는 게 법무법인 한누리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대우전자 소송은 개미들만의 투쟁이었지만 이번에는 국민연금공단 등 기관투자가들도 소송을 제기했고, 아직 대우조선은 손해배상을 감당할 여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안진 상대 소송의 쟁점은 역시 과실과 인과관계 인정 여부가 될 전망이다. 김 변호사는 “‘분식회계→부실감사→투자자 피해’라는 반복되는 악순환 고리를 끊는 계기로 작용할 판결이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변호사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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