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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집단 죄의식’의 심연에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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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호 14면

베른하르트 슐링크

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그 세대 전체의 이야기처럼 묵직하게 다가오는 소설들이 있다. 『책 읽어주는 남자』가 그런 경우다. 이 작품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독일 전체의 집단적 죄의식을 건드리고 있다. 자신이 한때 불꽃처럼 사랑했던 여인이 ‘나치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공포감과 실망감. 그 여자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뒤늦게 알게 된 그 여자의 죄만은 끌어안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을 때의 좌절감. 그것은 독일이라는 한 나라를 사랑했지만 나치의 홀로코스트만은 사랑할 수 없는 독일 국민의 마음을 닮았다. 나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독일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독일에 주목하는 이유는 ‘독일이 스스로 역사적 죄의식을 다루는 방식’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반성할 수 있는 일이라면 거의 무엇이든 했다. 베를린 한복판에 거대한 위령비를 만들었고, 커다란 유대인 박물관을 세워 그곳을 방문하는 전 세계인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표현했다. 위안부 문제에 사죄는커녕 죄의식 자체를 보여 주지 않는 일본이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 문제에 대해 결코 사죄하지 않는 미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독일은 자신들의 ‘집단적인 죄의식’을 테마로 하는 기념물이나 예술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무려 100여 년 전에 일어난 나미비아 집단학살에 대한 사과까지 결행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선거 일정으로 가장 바빴던 시기에 다하우에서 보여준 홀로코스트 사죄 모습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경이로움을 느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독일이라는 국가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데 중요한 시간을 할애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런 사죄의 몸짓이 ‘결과’는 될 수 없지만 ‘시작’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시작의 몸짓이 있어야 ‘집단적인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문제를 제대로 풀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이라고 할 때 흔히 ‘개인의 문제’를 먼저 떠올리지만, 바로 이런 집단적인 죄의식이야말로 심리학이 풀어야 할 최고의 난제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2009)

키스 하려 하자 “그 전에 먼저 책 읽어줘”『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 미하엘은 구토와 발열로 길바닥에 쓰러질 뻔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 준 여인 한나에게 운명적인 이끌림을 예감한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외부세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한 극도의 초연함을 보았다. 자신의 내면세계에 한 번 빠져들면 이 세상 그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기이한 순수.”


열여섯 살 소년이 서른여섯 살 여인에게 이끌려 키스를 하려 들자, 그녀는 몸을 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 줘야 해.”


그녀는 샤워를 하고 침대로 들어가기 전에 항상 ‘책’을 읽어달라고 요구했고, 소년은 책을 읽는 동안에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흠뻑 빠져 잠시 자신의 격정을 잊었다. “샤워를 하는 가운데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 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것은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그들은 ‘책 읽어 주기-사랑 나누기’의 비밀스러운 제의 속에서 오직 이 세상에 자신들만이 숨어 있는 듯한 은밀한 해방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달콤한 행복도 잠시, 한나는 멀리 전근을 떠나면서 자신의 행방을 알리지 않았고, 미하엘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녀를 잊지 못한 채 누구와도 행복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나치 전범의 재판을 참관하는 과정에서 피고석에 앉아 있는 한나를 발견하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는 ‘한나가 전범’이라는 사실만큼이나, 자신이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충격을 받는다.


한나는 수많은 유대인이 타죽는 현장에서 그들을 구해 주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보다 ‘그때 자신이 맡은 일’이었음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 청중을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그녀는 자신이 그 사건의 총책임자가 아니었고 ‘문맹’이었다는 것만 증명하면 중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문맹을 고백하는 것이 너무도 수치스러웠기에 차라리 무기징역을 택한다. 미하엘이 한 마디만 해 주었어도 형량을 줄일 수 있었지만, 그는 한나가 최악의 판결을 받는 동안 마치 자신을 버리고 떠나 버린 여인을 징벌하듯 ‘침묵’을 택하고 만다. 침묵은 이중의 단죄였다. 첫째, 자신에게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나 버린 옛 사랑에 대한 단죄. 둘째, 그녀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뉘우치지 않은 죄.


그 이후 미하엘의 마음속에는 지옥이 찾아온다. 이제 자신이 그녀를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한나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홀로 외로움에 떨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그녀를 위한 아주 작은 위로의 선물을 준비한다. 직접 명작 소설들을 낭독한 녹음테이프를 전달함으로써 그녀가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 준 것이다. 마치 연극배우라도 된 듯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안톤 체홉의 주인공들 영혼에 빙의되어 무한한 열정으로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 테이프’를 만들어 보낸다.


이에 감명 받은 한나는 평생 처음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꼬마야”라고 불렀던 스무 살 연하의 옛 연인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으므로.


하지만 ‘사랑’에서 ‘우정’으로 바뀐 그들의 관계는 거기까지였다. 미하엘은 한나의 ‘전부’를 끌어안을 수 없었다. 미하엘은 한나의 석방 이후 그녀를 진심으로 보살펴줄 자신이 없었고, 오랜 수감생활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그녀는 죽음을 택하고 만다.


우리가 만약 한나처럼 생계를 위해 나치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주체적인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 한나는 나치의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는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한나의 동료들은 모두의 죄를 한나 한 명에게 뒤집어씌웠고, 재판에 모인 청중은 ‘그녀는 유죄고, 나는 아니다’라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과연 무죄일까. 이 작품은 모든 집단적 죄책감을 한 사람에게 대속하여 그를 희생양으로 삼은 채 ‘나는 괜찮다. 나는 무죄다’라며 모든 책임에서 해방되려는 독일인들의 집단 무의식을 뼈아프게 풍자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친일파라는 둥 매국노라는 둥 쉽게 비난을 퍼붓지만, 과연 우리 중 몇 사람이나 윤동주나 이육사처럼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목숨 걸고 지킬 수 있을까. 그런 물음에 다다르니 이 소설이 단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아픔을 대충 얼버무리며 살아가는 지구상 모든 나라들의 뿌리 깊은 집단적 죄책감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한 사람 희생양 삼아 죄책감 벗어나려 해나는 이 소설에 담긴 아름다운 구원의 열쇠가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토록 한나를 원망했음에도 미하엘은 그녀에게 계속 ‘책 읽어 주는 남자’로 남고 싶어했다는 것. 그러니까 그녀와 끝까지 소통하려 애썼다는 것이다. 아무리 죄가 깊어도, 그 죄와 소통하려하 노력만 있다면 희망은 끝나지 않는다.


두 번째 구원은 한나가 평생의 콤플렉스였던 문맹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미하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그녀는 모든 것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사랑과 구원에 대해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모습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구원의 열쇠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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