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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서태후, 한 끼에 128가지 음식…농민 1명 1년치 식비 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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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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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반 리 셰프가 지난 9일 서울 JW메리어트호텔에서 진행하는 ‘글로벌 고메 프로젝트’ 참석차 방한해 황실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20여 가지 음식으로 구성된 코스요리를 선보였다. [사진 장진영 기자]

“서태후는 중국 황실 역사상 가장 까다로운 미식가였습니다. 샤오룽바오(중국식 만두) 하나를 먹더라도 아주 얇은 피로 완벽하게 모양이 잡힌 것을 내오지 않으면 호통을 치곤 했죠.”

중국 황실 요리 전문가 아이반 리 셰프

중국 베이징에서 ‘패밀리 리 임페리얼 퀴진’이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아이반 리(53) 셰프가 말하는 서태후(1835~1908)의 식습관이다. 서태후는 청나라 황제 함풍제의 후궁으로, 청나라 말기 동치제와 광서제의 섭정을 지낸 인물. 외세의 침략에 맞서 근대적 개혁을 꿈꾼 여성 리더로 평가받는 한편 사치와 향락을 즐긴 ‘중국 3대 악녀’로 꼽힌다.

리 셰프는 “서태후는 한 끼에 128가지의 음식을 먹었는데 당시 농민 한 명의 1년치 식비를 한 끼에 쓸 만큼 호화로웠다”고 설명했다.

리 셰프가 이처럼 서태후의 식습관에 정통한 것은 독특한 집안 내력 덕분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청나라 지배층 만주족으로 황실 식사를 담당한 어선방 환관을 관리하던 내무부 관료였다. 정2품에 해당하는 ‘도총’이란 고위 관직을 지낸 그는 정계에서 물러난 후 황실 음식을 기록으로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1985년 그의 후손들이 황실요리 전문식당을 열었다.

리 셰프는 메인 격인 베이징 레스토랑을 비롯해 누나 셋과 함께 도쿄·타이베이·파리·톈진에서 레스토랑 5곳을 운영한다. 그중 도쿄 레스토랑이 2008년 미쉐린(미슐랭) 2 스타를 받으며 이름을 알렸다. 서울 반포동 JW메리어트호텔에서 10~14일 열리고 있는 ‘글로벌 고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지난 9일 중식당 ‘만호’에서 만났다.

리 가문의 요리책에 나온 청나라 황실요리는 6000여 가지에 이른다. 여기에 쓰인 식재료 종류만 1만 가지 이상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중국 동북 3성 지역에서 황실에 의무적으로 바친 연간 식재료 양은 노루 혀와 꼬리 각 2000개, 노루 780마리, 사슴 270마리에 달한다. 생선류는 각기 다른 어종으로 4000여 종을 바쳤고 고급 식재료인 곰이나 호랑이는 잡히는 대로 황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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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부터 길선미 새우완자 수프, 죽순과 버섯을 곁들인 바닷가재 볶음, 제비집과 닭고기를 곁들인 쌀국수. [사진 장진영 기자]

리 셰프는 “황제와 황태후의 상에는 120~130가지 음식이 올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겸상을 하는 법은 없었다. 황제의 주방과는 별도로 황태후를 위한 작은 주방이 따로 있었다. 이들의 한 끼를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3일, 때론 5일이 걸렸다. 환관이 동석해 황제의 젓가락이 자주 간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을 기록하고 황제가 입을 안 댄 음식은 두 번 다시 상에 올리지 않았다.

“취향에 따라 황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여러 가지를 올렸어요. 건륭제는 오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끼니마다 오리요리가 10여 가지씩 나왔죠. 4대 황제인 강희제는 흑돼지구이를 좋아해 한 달에 296마리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고요.”

그러나 황제 위의 권세를 누린 서태후를 따라올 자는 없었다. 그녀는 이전 황제들이 거의 찾지 않았던 상어 지느러미(샥스핀)·전복·제비집 등 각종 고급요리를 섭렵했다.

“건륭제는 상어 지느러미를 싫어했습니다. 황실에선 선례를 중시했기 때문에 위대한 건륭제가 꺼린 음식을 후대 황제들은 감히 먹지 못했죠. 그런데 이러한 관습을 뒤집은 사람이 서태후예요. 서태후가 샥스핀 맛을 진짜 좋아했다기보단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먹은 것으로 보입니다.”

화려한 음식을 즐긴 서태후 덕분에 당시 그녀의 음식을 준비하던 부엌에만 ‘서쪽 주방’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청나라 땐 사냥이 인기가 많아 그만큼 다양한 식자재가 등장했다. 호랑이와 코끼리 고기, 곰 발바닥같이 희귀한 재료가 황실은 물론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서태후 이후에 제비집은 매끼 먹을 정도로 흔한 요리가 됐는데, 한 상에 10가지 이상의 제비집을 사용하기도 했다.

리 셰프는 “제비집이 건강에는 물론 피부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말이 전해지며 너도나도 제비집을 찾았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인도네시아에서 제비집을 수입할 정도였다.

식재료를 쓰는 데 제한은 없었지만 기준은 엄격했다. 돼지는 25㎏짜리만 사용했다. 황실요리사가 수없이 요리하고 시식한 결과 가장 맛있는 중량이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리 셰프는 “궁중요리는 식재료의 특징을 살려 본연의 맛을 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며 “성격이 다른 재료를 무분별하게 함께 쓰지 못하도록 금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제비집으로 탕을 끓일 때는 닭의 껍질과 뼈는 제거하고 순살코기만을 사용해야 했다. 그는 “음식 주재료가 지닌 맛을 가리거나 다른 재료로 바꾸는 걸 금기시했다”고 덧붙였다.

일반적으로 중국 요리는 기름지고 간이 센 것으로 알려졌지만 황실요리는 오히려 맑고 깨끗한 맛을 추구했다.

리 셰프는 “황실요리는 중용을 중시했다”며 “너무 맵지도 짜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중용의 맛이야말로 천하의 중심인 황제에게 부합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글로벌 고메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당시 한식 전문가인 한복진 전주대 교수를 만나 처음으로 조선왕조 궁중요리를 접했다. 그는 “간이 약하고 재료 고유의 맛을 잘 살린 것이 양국 궁중요리의 공통점”이라고 덧붙였다.

“후난성 지역 음식은 맵고 산둥성 지역 음식은 짠 편인데, 황실요리는 전혀 다릅니다. 기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간을 약하게 한 아주 건강한 음식이죠. 예로부터 중국에선 ‘너무 강한 음식을 먹으면 아무 맛도 못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런 기본원칙이 현대에 와서 잘 지켜지지 않고 자극적인 입맛으로 바뀐 것 같아 안타까워요.”

리 가문이 운영하는 5곳의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는 황실요리는 약 100가지다. 3~4개월에 한 번씩 메뉴를 교체하지만 아직 그가 보유한 6000여 개 레시피 가운데 공개하지 않은 요리가 많다.

“30년 넘게 레스토랑을 운영하지만 아직까지 재현하지 못한 어려운 메뉴가 많습니다. 곰 발바닥이나 호랑이고기처럼 지금은 찾을 수 없거나 너무 비싼 식재료도 많고요. 그럴 땐 꿩을 닭으로 대체하는 식으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최대한 과거의 맛을 충실히 재현하는 게 제 임무라고 생각해요.”

그는 “나는 황실요리를 재현할 뿐 새롭게 창조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리 셰프의 증조부가 남긴 책은 중국 내에서도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고서에서 당시 황실에서 어떠한 요리를 먹었다는 글귀를 본 적은 있지만 상세한 재료나 조리법까지 나온 책은 없다”며 “반면 증조부의 책엔 조리 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어 충분히 그 맛과 형태를 짐작하며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원래 호주 로열 멜버른 공과대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였다. 아버지는 수학과 교수, 어머니는 소아과 의사로 집안에서 요리를 전문으로 배운 사람은 없었다. 6세 때부터 곁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배운 요리는 그에게 일상이었지만 레스토랑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중국 내에서 개인사업이 허용되던 77년 무렵이었다. 당시 교수직을 은퇴한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으로 셰프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평소 한류 팬인 세 딸을 통해 삼겹살·라면 같은 한식을 자주 접한다.

[S BOX] 진귀한 해초 ‘길선미 수프’ 먹고 병 나은 왕자

청나라 말기 황제의 밥상엔 어떤 메뉴가 올랐을까. 아이반 리 셰프가 10~14일 JW메리어트호텔 서울 중식당 ‘만호’에서 선보인 코스 요리는 식전 메뉴만 해도 10가지가 넘는다. 리 셰프가 메인 코스 메뉴에서 추천한 메뉴는 세 가지다. 우선 ‘죽순과 버섯을 곁들인 바닷가재 볶음’.

고서에 따르면 청나라 황제들은 해산물 가운데서도 상어 지느러미(샥스핀)나 해삼·전복 등을 즐겼다.

리 셰프는 “한국·일본과 달리 서양권에선 해삼 같은 식재료를 즐기지 않아 바닷가재 등으로 대체해 선보이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양념한 간장과 설탕·식초·참기름을 넣어 소스를 만든 다음 튀긴 바닷가재와 죽순·버섯을 넣고 버무려 볶은 요리를 내놨다.

‘길선미 새우완자 수프’는 이름부터 생김새까지 독특하다. 길선미는 동그란 모양의 작은 수초인데, 주로 깊은 산속 깨끗한 물에서만 찾을 수 있다.

리 셰프는 “진나라 때 길선이라는 승려가 이 수초를 구해 병약한 왕자에게 바치니 왕자가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훗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전설을 가진 식물”이라며 “승려의 이름 ‘길선’에 동글동글한 모양이 꼭 쌀처럼 보인다고 해 ‘미(米)’를 붙여 길선미라 불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1급수에서만 나는 귀한 식물이라 중국 내에서도 지난 50년간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였다”고 덧붙였다.

리 셰프는 이번 행사를 위해 직접 중국에서 재료를 공수해 왔다. 닭고기 육수에 길선미와 순채, 새우완자를 넣어 소금으로 간을 해 수프를 완성했다.

제비집 요리는 서태후가 즐겨 먹던 음식이다. 리 셰프는 이번에 두 가지 제비집 요리를 선보이는데, 디저트류로 차게 먹는 ‘녹두 제비집 감채’와 제비집에 닭고기를 곁들인 쌀국수가 그것이다. 쌀국수의 경우 과거엔 꿩을 넣어 요리했지만 현재는 구하기 어려운 탓에 닭고기로 대체해 튀긴 쌀국수 요리를 만든다.

글=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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