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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다 쥐고 명예로울 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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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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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할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장례식이다. 정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커다란 성조기를 삼각형으로 접어 유족에게 전달한다. 제복으로 상징되는 군인의 죽음은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함의를 갖는다. 그래서 국가의 상징인 국기로서 유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성조기는 원칙에 맞춰 별이 보이도록 접힌다. 접는 동작 역시 최대한 절도를 갖춘다. 국가와 국기에 대한 예의고, 고인의 헌신에 대한 예우다.

구겨져서는 안 되는 군의 제복
옷장 양보한 미 일등석 승객들
젊은 병사들이 지킨 군의 명예
고위 공직자가 짓밟는 우리 현실

하지만 아무리 정성을 다했대도 결국 국기 한 장이다. 그것으로 목숨과 바꾼 희생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 가지다. 평소 군인들이 국가 구성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어서다.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의 군인들은 세계에서 전쟁과 전투 경험이 가장 많은 군인들이다. 지구 곳곳의 분쟁지역에 파견돼 목숨을 건 작전을 수행한다.

여기서 선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잘잘못을 떠나 국가 이익을 위해 정부가 결정한 일이다. 군인들은 명령에 따라 자신의 임무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들도 군인들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다. 국가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그들을 존경하고 불가피한 희생을 안타까워한다.

군인들도 언제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돼 있고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국민적 신뢰와 존경을 받는 군인인 것이 명예롭기 때문이다. 그 명예만 훼손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희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마셜 플랜으로 유명한 조지 마셜 장군의 말이 바로 그 얘기다. “군인의 영혼은 그가 가진 육신보다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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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좋은 예가 있다. 2014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을 선언할 때의 일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귀국해 집으로 돌아가던 앨버트 마를 상사가 구겨지지 않도록 제복 상의를 옷장에 보관해 달라고 승무원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이코노미석 탑승권을 가진 상사는 퍼스트클래스 승객용 옷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때 일등석에서 한 노신사가 일어나 승무원을 나무란 뒤 마를 상사에게 자기 대신 옷장을 쓰라고 권유했다. 이어 다른 일등석 승객들이 너도나도 마를 상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시작했다. 마를 상사는 정중히 사양했고, 이 항공사는 나중에 사과 광고를 내야 했다. 훈장이 가득 달린 마를 상사의 제복은 결코 구겨져서는 안 되는 군인의 명예였고, 일등석 승객들의 양보는 그 명예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시민의식이었던 것이다.

기세 좋던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낙선(또는 낙마)한다면 이 또한 군인의 명예를 욕보인 사건이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게 분명하다. 힐러리 클린턴 지지 연설자로 나선 이라크전 전사자 후마윤 칸의 어머니를 조롱한 막말 말이다. 여기서도 트럼프가 민주당이 쳐놓은 덫에 걸렸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무슬림을 욕하던 나머지 그만 자기 부대원을 보호하려고 자살폭탄 트럭을 막아서다 전사한 영웅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만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층인 재향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트럼프 지지율은 크게 떨어졌고 공화당 내에서조차 ‘지지 불가’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에겐 안 된 일일지 몰라도 군인이 존경 받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그만큼 군 스스로 명예를 지키고 있다는 방증인 까닭이다. 명예를 아는 군은 아무리 분열된 사회라도 함부로 흔들 수 없다. 트럼프처럼 자기가 나가떨어질 뿐이다.

우리 군도 그런 명예를 많이 보여줬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때 헬멧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대응사격을 하던 해병대원의 모습에서, 북한의 지뢰 도발 때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동료를 구하던 수색대원들의 모습에서, 북한의 4차 핵실험 때 900여 명의 장병이 스스로 전역을 연기하는 모습에서 우리 군의 명예가 빛났다. 모두 군을 대변한다기엔 너무 어린, 젊은 병사들의 행동이었기에 더욱 찬란했다.

그에 비해 군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처신들은 훨씬 덜 성숙한 것 같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핵심 참모라면 병역의무 중인 아들의 보직이 편하게 바뀌는 걸 막았어야 했다. 공연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고, 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도 그랬다. 아들로 하여금 국회에서 인턴 스펙을 쌓게 하는 대신 또래들과 같은 경험을 통해 정당한 경쟁의 의미를 깨닫도록 해줘야 하지 않았을까. 고도근시로 병역을 면제받은 고위 공직자라면 사회에 진 빚을 갚는다는 의미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 군의 명예를 빛내고 스스로도 명예로울 수 있었다. 그 혼자만이 아닐 터다. 얼마나 많은 고위 공직자가 지금 명예로울 기회를 잃고 있을까.

명예로워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걸 다 거머쥐고 명예롭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명예가 뭔지 모르니 결코 명예로울 수 없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딱히 어울리는 말도 아닌데 왜 그럴까. “나는 전쟁이 얼마나 구역질 나는 짓인지를 안다. 하지만 더 구역질 나는 것은 전쟁에는 나가지 않으면서 전쟁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지뢰 도발 1주년을 맞아 명예로운 재활에 애쓰고 있는 김정원 하사의 수기를 읽으며 든 단상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