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티 타임의 정사」를 보고|김방옥 <연극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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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동숭동 샘터 파랑새극장에서 소문없이 l00회 무대를 돌파한 연극이 공연되고있다.
극단 민중이 작년말부터 전용 소극장에서 롱런하다가 옮겨온 『티 타임의 정사』(「해드·핀터」작·김철리연출· 4월6일까지 공연)가 그것이다.
원제목이「The Lovers」인 이 작품은 우리나라 소극장에서 낯익은 단골 레퍼터리이기도 하다. 남녀배우 두사람이 펼쳐내는 애정의 충격적인 변주곡이 작은 극장공간에서 관객을 흡입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원래 영국에서 TV극으로 쓰여졌던 이작품은 권태로운 부부의 에로틱한 팬터지를 소재로 하고 있다. 「리처드」는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부인「사라」와 함께 원저부근 교외에 살며 통근한다.
『오늘도 당신 애인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소?』라는 지극히 담담하면서도 충격적인 대사로 연극은 시작된다. 둘째 장면에서 관객들은「사라」가 맞아들이는 전혀 다른복장의 정부가 바로 「리처드」자신임을 알고 놀란다.
그들은 콜걸, 공원지기등으로 상황과 역할을 바꿔가면서 성 유희를 즐긴다. 세째 장면은 다시 본래의 평상복으로 퇴근한「리처드」와 그를 맞는 부인 「사라」. 그들의 권태로운 일상과 환상의 구분마저 포기하는데 이른다.
성적 환상은 누구나 다소간에 꿈꾸는 것이다. 성에 대한 헛된 기대치를 부채질하는 여성지나 뒤적이고 있는 우리나라 아파트 주부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의 성적 환상은 이 연극에서 독특한 입체감을 띠고 다가온다.
불과 몇마디의 짧은 대사로 긴장을 야기하고 그 긴장에 반전을 거듭시키는 뛰어난 극작술, 오직 연극이기에 가능한 극중변장이라는 놀라운 착상 때문이다.
연극이 끝나도 관객은 두남녀의 실체가 평범한 소시민인 「리처드」와 「사라」인지, 혹은 사회관습에 길들여진 부부의 가면을 쓴 성도착자들인지 알지 못한다.
아니, 우리 누구나가 자기몸에 또 하나의 자기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것, 그리고 둘중 어느것이 본질적인 것인지 알수없다는 점이 이 극작가가 말하는 바일지도 모른다. 다만 두 연기자의 경직된 연기와 너무 느리고 중압적인 극진행이 원작의 맛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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