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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순<본사논설위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해마다 대학입시의 열풍에 가려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한채 어물쩍지나쳐 버리는 문제가 있다. 고입 낙방생들이다.
간헐적으로 신문에 보도는 있고 한두마디 논평도 있지만 그뿐이다. 별다른 주목도 끌지 못한채 곧 잊혀진다. 낙방생을 둔 집안에서도 창피해서인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쉬쉬 덮어버리고 만다.
올해의 경우 서울만 해서 그 숫자는 3만1천명을 헤아린다. 인문계고교 진학희망자 14만6천여명 가운데 28%인 4만여명이 고입연합고사에서 탈락했다. 그중 약1만명은 인문계 야간고교가 흡수했지만 나머지는 그나마 갈곳이 없다.
시험인 이상 탈락자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슨 장기적인 인력수급계획이나 확고한 교육정책에 따른 방침이라면 또 모른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 까닭은 간단하다. 수용할 학교시설이 모자란다는 게 이유의 전부다.
시설이 남아도는 시골이라면 1백% 받아들이면서 교실이 부족하다고 진학을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으니 이만저만 딱한 일이 아니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수는 없다.
마치 몸에 맞추어 옷을 해 입는게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추자는 형국이나 같다.
세계 여러나라가 다투어 교육계획에 열을 올리는 것은 한나라의 장래가 교육의 양과 질에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학진학률이 높아지는 것 또한 세계적인 추세다.
카네기 고등교육심의회는 서기2000년 미국의 18∼21세 청년가운데 대학생의 비율이 73%에 이른다고 예측한바 있다.
일본의 경우 역시 21세기가 되면 총인구에서 점하는 대졸자의 비율은 6할에 이르고 2100년엔 1백명중 96명이 대졸· 대학원졸이란 초고학력사회가 출현한다는 예상이다.
그런 고학력사회가 꼭 좋은것인지 여부는 논외로 치더라도 국민 모두를 나름대로의 희망과 능력에 따라 교육시키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고 보는 게 선진국 일반의 인식이다.
미국이 12년, 영국이 11년동안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이웃 일본이나 자유중국에서도 중학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한게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교육받을 권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고입탈락자들이 해마다 늘어나는걸 아무렇지 않게 방치하는 당국의 무신경·무감각은 도무지 납득이 안간다.
더욱 기이한 것은 학급당 인원을60명에서 58명으로 줄인 조치다.
과밀학급을 해소하는게 화급한 과제임은 다 안다. 다만 그 방법은 학교를 더 짓고 교실을 늘리는데서 찾아야한다.
가뜩이나 시설이 모자라 매년 몇만명씩이 「교육기아」로 거리에 내 쫓기는 형편에서 무작정 학급당 인원을 줄이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서울의 인문계교 총학급수는 1천7백82개다. 한반에서 두사람을 줄이면 3천5백여명의 진학의 길이 막힌다.
일방적인 행정명령 하나로 학급당 인원을 줄여 과밀학급 해소를 하려들면 그야 식은 죽 먹기다.
국민학교·중학교의 콩나물 교실을 조금씩이나마 해소시키고 있는 것은 평가받을만 하다. 고교의 경우 낙방생의 숫자를 훨씬 줄이면서 학급당 인원을 줄였다면 물론 내세울만한 공적사항이다. 그러나 낙방생이 증가일로인데도 학급당 인원을 인위적으로 감소시키려드니까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각급학교가 나름대로 완결교육을 표방은 하고있으나 실제로는 오직 상급학교 진학만을 위주로 해 짜여져 있다.
재수나 직업훈련을 받아 재기를 꾀하는 건실한 청소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방향감각도 없이 성인사회로 떠밀려 간다.
경직화된 학제나 교육과정 때문에 적절한 직업교육은커녕 별다른 교육경험도 없으니 취업이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고졸의 경우보다 중졸의 경우는 더 말할게 없다.
오늘날 청소년문제가 심각하다고들 입을 모은다. 특히 한해 40만명씩이나 되는 미진학 청소년문제는 핵심적인 사회문제의 하나로 꼽힌다.
물론 이들 「주변집단」의 문제를 한꺼번에 풀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오늘의 과제다.
단번에 풀길이 없다고 해서 포기할수는 없다. 각분야에서 나름대로, 그리고 조금씩이나마 나아지도록 노력해야한다.
근본적으로 정부가 해야할 일은 교육제도 전반을 재점검,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겠지만 당장 시급한 일은 「교육기아」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교육시설을 대폭 늘리는 일일 것이다.
국가재정으로 모자라면 민간의 투자를 적극 유치해야한다. 현행제도는 육영사업에 뜻이 있어도 손을 대기가 아주 어렵게 되어 있다고들 한다.
작년 서울시교육위원회가 10개의 사립고교신설을 목표로 했을 때 단한사람만이 응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사학유인체제가 얼마나 부실하고 구두선에 그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상급학교 진학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고교입학을 시설부족이란 단한가지 이유로 막아놓고 나몰라라하는 정부의 태도가 온당치는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무신경이다. 고교에조차 들어가지 못한채 사회에 내팽개쳐진 수험생의 좌절은 당사자나 그의 가정만이 아니고 사회전체의 부담이며 손실이 된다는것을 왜 생각하지 않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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