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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인줄 알았는데…' 20년 청춘 송두리째 앗아간 동창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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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이 여렸던 피해자는 20년 동안 진실한 우정이라고 믿었는데 사실은 철저하게 속았던 거죠. 지금 피해자는 지난 20년의 세월이 너무 억울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고교 동창을 상대로 20년 넘게 사기행각을 벌인 40대 여성의 범행 수법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면서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관이 이같이 말했다. 이 사건을 맡은 부산경찰청 광역수사대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해봤다.

충남이 고향인 김모(44·여)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 진학은 엄두도 못 냈다.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김씨는 17살이 되던 해에 부산으로 왔다.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김씨는 신발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고교 야간반을 다녔다. 주경야독 끝에 김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한 전문대 식품영양학과에 진학했다. 간절히 바라던 대학에 다닐 수 있어 행복했다. 김씨는 졸업 뒤 부산의 한 중소기업내 식당의 영양사로 취업했다. 월급은 알토란 같이 차곡차곡 모았다.

김씨의 소소한 행복은 고교 동창생 권모(44·여)씨를 만나면서 송두리째 날아갔다. 김씨는 1994년 7월 또 다른 동창생을 통해 처음 권씨를 알게 됐다. 학생 때는 서로 몰랐지만 허전하고 외로움을 계속 타왔던 김씨는 권씨에게 쉽게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권씨는 심성이 여린 김씨를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데 이용했다. 권씨는 김씨를 처음 만난 해부터 온갖 거짓말로 속여 3년 동안 1800만원 가량을 받아 가로챘다.

김씨는 이후 회사를 옮겼으나 1998년 외환위기로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씨는 “다른 고교 친구가 교통사망 사고를 내서 합의금이 필요하다”, “사채업자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다”는 권씨의 거짓말에 속아 수백만원을 건네 줬다.

그러다 일본에서 지내던 어머니에게서 “일본에서 같이 살자”는 연락을 받았다. 회사도 문을 닫는 등 상심이 컸던 김씨는 199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김씨는 고깃집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권씨와의 악연은 끝나지 않았다. 권씨는 김씨의 사주가 좋지 않다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주변 사람이 죽는다'며 제사 비용으로 수천만원을 받아냈다. 김씨는 이 같은 수법에 속아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인 돈을 고스란히 한국에 있는 권씨에게 송금했다.

영주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김씨는 2009년 1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권씨는 더 악랄한 수법으로 돈을 뜯어갔다. 권씨는 김씨에게 “신체 중요 부위에 귀신이 있다. 남자와 성관계를 해야 살 수 있다”고 속였다. 한 번도 권씨를 의심하지 않았던 김씨는 이번에도 속아 넘어갔다. 권씨는 2010년 3월부터 지난 6월까지 김씨에게 성매매를 시켜 벌어들인 수억원의 수익금을 챙겼다.

그러나 권씨가 제 꾀에 속으면서 20년에 걸친 사기행각은 전모가 드러났다. 권씨는 김씨에게 더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 “너의 성관계 동영상이 퍼져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채 6000만원을 끌어다 썼는데 그 때문에 청송교도소에 가게 됐다”고 속였다. 김씨는 친구가 자신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됐다는 말에 죄책감이 들었다. 김씨는 권씨를 면회하기 위해 청송교도소 수감 여부를 알아보려고 가까운 부산구치소에 가서 확인했다. 하지만 권씨 이름의 수감자는 찾을 수 없었다. 수상함을 느낀 교도관이 김씨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으니 경찰에 신고해봐라”고 권유했다.

설마 하는 생각에 반신반의하던 김씨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권씨의 범행이 들통났다.

경찰은 20년 동안 2389차례에 걸쳐 8억원 상당을 받아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권씨를 구속했다고 5일 밝혔다. 경찰 조사 결과 권씨는 김씨에게서 받은 돈으로 유럽·일본 등 해외여행을 다니고 부산 강서구의 145㎡ 고급 전세 아파트를 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1년에 수천만원을 사용해야 가능한 백화점 VIP 고객으로 등록돼 있었고 검거 당시 집에 있던 금고 속에는 현금이 7000만원가량 있을 정도로 호화생활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권씨는 뒤늦게 경찰 조사에서 “친구에게 미안하다”며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3억원 상당의 권씨 전세 아파트 보증금을 몰수하기로 했다. 경찰 관계자는 “실제 확인된 피해금액만 8억원 상당으로 피해자가 주장하는 피해금액은 13억원에 달하고 있다”며 “김씨는 6.6㎡ 남짓한 고시텔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의지할 데가 마땅치 않았던 김씨가 우정이란 이름에 속은 것 같다. 권씨가 돈을 거의 탕진한 것으로 보여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부산=강승우 기자 kang.seung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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