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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룸 하이웨이를 가다|고선지장군의 발길을 따라<10>|이용범 교수<동국대·동양사>역사기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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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9면

고대로부터 중세기에 걸쳐 페샤워르가 중국이나 신라의 불교도들에 꼭 들러야 하는 순례지의 하나로 돼 있었던 것은 법현의 『불국기』를 비롯, 송운의 여행기와 현장의 『대당서역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저기』 에서도 「건타라국」 을 소개하는 중에 페샤워르의 신앙생활과 법속같은 것이 다른 곳에 비해 상세히 적혀있는 점에서 알 수 있다.
7세기의 중국승 현장에 따르면 당시 페샤워르는 둘레가 구리였으나 마침 왕사가 끊겨 아프가니스탄의 가피샤국(가필시국)에 복속돼 마을은 황폐하고 주민이 크게 줄어든 도시였다. 우리는 페샤워르대학 박물관을 찾았다. 상오 9시를 훨씬 지나고 있었지만 넓은 교정엔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겨우 고고학교수 한 분을 만나 알아보니 겨울방학 중이어서 박물관의 책임자가 출근하지 않아 문을 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페샤워르 박물관으로 달러갔더니 이번에는 절전을 위한 정전중이므로 하오2시30분에 와달라며 미안스런 표정을 짓는다.
옛 도읍지에 들어선 이슬람교 공동묘지
이곳에 와서 일이 이렇게 뒤틀려 보기는 처음이다. 그때까지는 4시간을 더 기다려야하니 그대로 시간을 허송할 수도 없어서 그동안 「카니시카」2세의 옛 도읍지인 샤지키디리라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 옛 도읍지의 위치를 물어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안내자 「칸」 씨의 노력으로 겨우 그 대체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찾아간 페샤워르 교외의 이 옛 도읍지는 노목이 우거진 한줄기의 옛길만 남아 있을 뿐 유적이라근 찾아볼 수 없는
폐허가 된 채 요란스럽게 장식한 이슬람교도의 공동묘지로 변해 있었다. 그 옛날 구법고승들이 거의 빠짐없이 거쳐갔던 국제도시의 영화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새삼 인류역사의 영고성쇠를 실감케 한다.
정전이 해제된다는 2시30분이 돼도 여전히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다과를 권하며 우리들과 같이 전등불을 기다리던 페샤워르 박물관장 「세라이」 박사와 직원들이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순박하고 외국손님에게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파키스탄 사람들의 마음씨는 때에 따라 도리어 부담스럽다.
약속된 시간에서 한시간 늦은3시30분에야 불이 켜져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었다. 박물관으로선 그리 넓다고 할 순 없으나 진열된 유물은 미술사 도록을 통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불교조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어느 것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불상조각품이었다. 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무한한 소망과 높은 품위가 차가운 돌을 통해 속된 일에만 쫓기어 뛰고 있는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달래 주는 것 같았다.
특히 2층 한 모퉁이엔 그리스신상에서 불상으로 바꿔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이 체계 있게 진열돼 있었다.
신상에서 불상까지 체계 있게 볼 수 있어
일행이 비를 무릅쓰고 가이발 고개를 향해 차를 몬 것은 다음날인 25일 상오 7시20분. 이 고개는 예로부터 동과 서의 두 세계를 이어주던 국제교통의 대동맥으로 유명한 곳이다.
차가 페샤워르를 벗어나 넓은 가도로 들어설 무렵부터 오른쪽에 아프가니스탄의 난민촌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판자 집과 낡고 찢어진 천막에선 수많은 난민들이 나와서 달리는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교국으로부터의 구호금으로 1인당 하루에 얇은 떡 세 조각과 적은 량의 감자를 얻어 앞날의 희망도 없이 겨우 목숨만 이어가고 있는 이 아프가나스탄 군중을 1백만명이나 받아 보호하는 파키스탄의 고충도 적지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허가 없는 외국인 고개 넘을 수 없다"
파키스탄의 그 어느 지역보다도 군 차량의 통행이 심하다. 가이발 고개의 진입로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 우리는 군에 의해 더 이상의 운행을 정지 당하고 말았다.
『외국인은 군과 내무부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다』 는 큰 게시판이 길옆에 버티고 서있었다. 그 옛날 고선지 장군의 예하 부대가 넘나들던 그 가이발 고개에 다시 서서 아프가니스탄을 바라보고 싶었던 나의 소망은 순간 무산되고 말았다. 이 고개는 1842년1월 이른바 제1차 아프가니스탄 전쟁당시 1만6천명의 영국정규군 및 1만명의 영민간인이 철수작전시
아프가니스탄의 습격으로 겨우 1명만 살아남아 이곳을 거쳐 파키스탄으로 되돌아 왔다는 영전사상 최대의 오점을 남긴 고전장으로도 유명하다.
치트랄로 가려다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을 때의 그 좌절감을 이곳에서 다시 한번 맛봐야했다.
혜초가 『산은 열기에 덮여 풀과 나무를 볼 수가 없다』 고 적어 남겼듯이 산과 들의 메마른 풍치 속에 쿠샨왕조의 초기 도읍지였던 챠라사도르의 유적지를 찾아보고 페샤워르 공항에 도착한 것은 가이발 계곡을 떠난 지 2시간만인 하오3시. 3시40분발 라호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까다로운 탑승절차를 치르고 대기실에서 이슬비가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며 탑승 안내를 기다렸으나 이륙시간이 훨씬 지난 4시가 돼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1백명이 넘는 탑승객들이 웅성대기 시작하자 기류관계로 결항하게 됐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다음 여객기는 내일 이 시간이라고 하니 우리에겐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국체공항인 라호르에서 우리의 다음 조사지역인 인도로 가는 여객기는 10일전에 이미 모두 예약돼있어 몇 차례의 어려운 교섭과 신성오공사의 노력으로 26일 하오 4시에 떠나는 임시 비행기편을 간신히 예약해놓고 왔기 때문이다.
만약 이 비행기를 놓치면 우리는 꼼짝없이 라호르에서 꼬빡2주일은 기다려야 뉴델리로 갈 수 있다.
남은 유일한 방법은 우중의 험난한 5백km길을 차를 빌어 주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뇌성과 번갯불이 번쩍이는 밤길을 헤치며, 운전사가 졸지 않도록 번갈아 말을 걸어가며 달려 라호르에 도착한 것은 페샤워르 공항을 출발한지 9시간이 넘는 26일 새벽3시20분이었다.
우리는 잠깐 시간을 내어 다시 한번 라호르 박물관을 찾아갔다. 거기 유물을 보면서 종교 의 성쇠와 그것이 지니고 있는 뜻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차로 5백km달려 새벽에 라호르 착
그것은 비단 이 박물관뿐 아니라 우리가 참관한 이 나라 여러 박물관의 문화재중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불교유물의 내용과 현재 이 나라의 종교현황이 너무도 거리가 벌어 당혹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득한 예부터 힘으로 밀어붙여 이긴 종족만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인더스강 유역에서의 생사를 건 투쟁에서 「자비」의 구현을 이상으로 한 철저한 평화주의의 실천철학인 불교가 삶의 기본이념이 되기엔 너무가 괴리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이에 비하면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이란 이슬람교의 종교신조가 이 지역의 생활조건엔 더욱 현실적이었던 까닭에 국교로까지 발전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끊임없이 변천하면서도 되풀이되는 인간생활의 한 단면인지도 모른다. 다시금 카라코룸 하이웨이가 이 나라의 미래에 미칠 영향같은 것을 생각해본다.
동북으로 중공, 서북으로 아프가니스탄·소련으로 이어지며 만년백설의 비경을 뚫고 나와 다시 국제항인 카라치까지 이어지는 대동맥, 카라코룸 하이웨이-. 비록 세계의 어느 누구보다 금욕적이라곤 하지만 이 나라사람들은 이곳을 통해 불어오는 세계의 외풍 속에서 과연 그 종교적 계율의 생활신조를 언제까지 굳게 지킬 수 있을지….
이런 점에서 계몽기의 어느 프랑스사상가의 한마디 말이 생각난다. 『과실이 익지 않았을 땐 나무에 매달려 있지만 익으면 저절로 땅에 떨어진다』 고. 낡은 전통에만 움츠러 있을게 아니라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문화도 흡수함으로써 밝은 내일의 창조를 기대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매우 함축성 있는 명언처럼 떠올려진다.
정직하고 낙천적이며 구김살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 나라 사람들의 정든 얼굴을 뒤로하고 우리일행은 하오4시 라호르 공항을 이륙, 인도의 뉴델리로 향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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