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그림으로 마음 보듬는 '재소자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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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우리나라엔 부자(富者)가 많지만 자족(自足)할 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이만하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문 마당에 '이만큼 살게 됐으니 남을 도우며 살아야지'라고 마음먹는 사람은 더 드물 수밖에 없는 일.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본업도 내팽개친 채 일년 중 절반을 '감옥살이'를 자처하며 재소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강신영(姜信英.55)씨. 그는 분명 나누는 삶에 만족해 하는 사람 중 하나다.

사실 姜씨도 원래는 나눔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재원(才媛)들이 모인다던 이화여중.고를 졸업한 그는 경희대 의대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엔 '목좋은' 동네에서 개업의 생활을 했다. 10여년 동안 병원을 운영, 돈을 꽤 번 1990년대 초엔 살기 좋다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었다.

그런데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던 97년. 姜씨는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던 호랑이 그림을 미술잡지에 실은 것이 인연이 돼 편지 한통을 받았고 그뒤 인생관이 바뀌었다. 발신인은 미국 캘리포니아 감옥에서 살인죄로 사형집행 날짜를 기다리고 있던 리처드라는 사형수였다.

"호랑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손수 찍은 호랑이 사진과 미술교본. 화구 등을 보냈죠. 그런데 얼마 뒤 답장이 왔어요. 열심히 그림을 그려 자선행사에 내서 고아들을 도왔다고,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줘 고맙다는 편지였어요. 감동적이었죠."

그 순간 姜씨의 마음 속엔 '지금까지 모아둔 것은 나를 위해서는 충분하다. 이제부턴 수많은 '리처드'를 위해 살아보자'는 나눔정신이 싹트기 시작했단다.

姜씨는 그 이듬해인 98년 장성한 자녀(1남 1녀)들을 캐나다에 남겨둔 채 영구귀국했다. 그림을 통해 재소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종교단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교도소 내 봉사활동 참여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귀국 후 2년여 동안 서울 영등포 '쪽방골목'에서 행려자를 무료 진료해주는 요셉의원에서 일했다. 물론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미술을 하고 싶어하는 재소자들을 후원하는 일도 했다.

그러던 그에게 2000년 청송교도소장이 "미술반을 한번 꾸려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당장 달려갔죠. 25명이 모여 있더군요. 하지만 처음부터 순탄하진 않았어요. 어떻게 가르칠지가 막막했죠. 게다가 무엇보다 재소자들이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요."

그래도 姜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최고급 미술서적과 화구들을 사다 날랐고 함께 틈만 나면 그림을 보고 토론을 하자고 덤볐다. 함께 그림을 그려보자고 조르기도 했다. 일주일이면 3일을 청송교도소에 머무는 생활도 이때부터 해온 것.

효과는 있었다. 흥미를 잃은 이들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끝까지 남은 13명이 姜씨에게 지난 아픔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시는 죄짓지 않고 살겠노라는 맹세하는 이들도 늘어갔다. 그리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동안 그림 솜씨도 나날이 나아졌다. 이제 재소자들은 姜씨를 "엄마"라고 부른다.

"아들 녀석들이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데요. 또 어떤 그림을 들이대도 '이건 구도가 좋네''색채가 강렬하네요' 등등 제법 전문가다운, 그리고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죠. 이럴 때면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그림은 소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긴 했지만 아무튼 잘 고른 것 같아요."

姜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아들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오는 10월 22일부터 11월 4일까지 서울 관훈동 하나아트갤러리)를 연다. 비록 '작가들'은 오지 못하지만 전시회장을 촬영, 교도소에서 보여줄 계획이다.

그는 "그렇게 옥바라지를 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겠다"는 질문에 "일년에 3천만~4천만원쯤 드나"하고 혼잣말을 하다 "제대로 따져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재산 쌓아두면 뭐하게요. 지금 돌보는 아이들이 모두 출소하는 2012년까진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전용 화랑과 작업실을 세울 겁니다"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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