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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한정식집들 '김영란법 공포'…60년 전통 한정식집 문닫고 쌀국수집으로 바뀌기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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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유명 한정식집들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공포에 떨고 있다. 수십년 전통을 가진 한정식집이 매출 부진을 걱정해 문을 닫기도 하고, 살아남기 위해 메뉴 가격을 낮추는 방법 등을 고심 중이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한정식집 '유정(有情)'은 60년 전통의 유명 한정식집이다. 점심 메뉴가 3만원대, 저녁 메뉴는 5만원대 이상으로 가격대가 높지만, 조용한 분위기와 정갈한 음식맛으로 명성이 높아 유명인사들이 자주 찾았다. 특히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인들이 자주 찾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국회의원 시절부터 단골 손님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를 이어 운영돼온 이 식당은 매출 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이달 초 문을 닫았다. 특히 오는 9월 28일 시행을 앞둔 김영란법 제정이 결정적이었다. 고모로부터 식당을 이어받아 40여년간 운영해 온 손정아(68ㆍ여) 유정 사장은 “안 그래도 공무원들이 세종시로 대거 내려간 후부터 장사가 통 안됐는데, 이제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나면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게를 임대 주기로 결정하고 영업을 접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 식당에 오는 단골 손님 대부분이 기업 직원, 고위 공무원, 언론인이었는데 김영란법 때문에 이런 손님이 줄어들면 사실상 손님이 아예 사라지게 된다”며 “정부에서 이렇게까지 움츠러들게 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유정이 있던 곳에는 건물 리모델링을 마치면 다음달 중 쌀국수집이 들어설 예정이다. 손 사장은 “주변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 1만원대 쌀국수집은 장사가 좀 되지 않겠나”라며 “이 골목의 상권 자체가 고급 한정식집에서 평범한 음식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서 한정식집 '미당'을 운영하는 김광훈(53) 사장 역시 “저녁시간대에 괜찮은 한정식 메뉴를 시키면 10만원이 넘는데, 고위공무원들이 많이 찾아와서 그나마 장사가 됐다”며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이런 손님이 줄면 가게 장사가 너무 안 될 것 같아 고민이 크다”고 말했다.

메뉴 가격을 낮추거나 조금 싼 재료로 바꾸는 등의 방안을 고려하고 있는 한정식집도 있지만 대부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반응이다. 일반 식당에 비해 임대료나 인건비, 인테리어 비용이 많이 들고 한정식 자체가 여러 재료를 사용한 다채로운 요리들로 구성돼 있어 재료비를 줄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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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인근에서 한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46ㆍ여)씨는 “김영란법에 맞춰 2만9000원짜리 메뉴를 개발 중이다. 현재 판매하고 있는 8가지의 한정식 코스요리 중 가장 저렴한 메뉴가 3만8000원이기 때문에 여러 명이 먹고 한쪽이 대접할 시 김영란법에 저촉되는 가격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음식의 질이 떨어질까 걱정이 크다. 김씨는 “행사손님들이나 고위공무원, 기업 관계자가 전체 손님의 70~80%를 차지해 김영란법의 영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3만원 이하로 코스요리를 만들다보면 음식의 질이 떨어져 손님들이 실망하게 될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한정식집을 운영하는 박모(58)씨는 “우리 식당 한정식 중에 3만원 이하인 메뉴는 메인요리와 반찬, 후식으로 구성된 가장 저렴한 ‘정식’ 메뉴 뿐인데, 이건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마련해 놓은 저렴한 메뉴라 아무리 팔아도 돈이 안된다”며 “인테리어나 메뉴 개발 등으로 들어간 비용이 4~5억이고 임대료 300만원 정돈데 3만원 이하의 메뉴로만 구성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렵다”고 말했다.

정진우ㆍ윤정민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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