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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과 현실감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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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형법개정의 기본골격방향이 확정됨으로써 지난 84년부터 추진되어왔던 개정작업은 급진전될 것 같다. 앞으로 세미나와 공청회 등을 통해 각계각층의 의견들이 많이 반영되고 정기국회에서도 손질이 있을 것이지만 법무부가 성안한 형법개정의 뼈대는 그 동안 오랜 숙제로 되어있던「형사법 선진화」에 크게 근접한 느낌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33년전에 제정되었던 현행 형법은 너무 시대감각과 동떨어져 있었으며 헌법의 기본 이념을 충실히 수용하지도 못해왔다.
현실과 괴리되어 신종 범죄 등에 효과적인 저지력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환경권 등의 기본권을 보호 확인하고 새로운 가치관과 윤리관. 사회정세 변화 등에도 담보수단이 못되어왔다.
형법이 그 시대, 그 문화의 거울이 되지 못해 법 준수도, 적용도 할 수 없다면 그 실효성은 물론 규범적 효력도 상실하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형법에 환경범죄·진술강요죄·독극물 흡입죄·대화비밀 침해죄·자동설비부정 이용죄·컴퓨터범죄 등을 새로 신설하고 그 동안 논란이 많았던 간통죄와 단순도박죄 등을 폐지키로 한 것은 매우 주목된다.
더구나 사형범죄범위를 축소시키고 벌금형의 공정성과 실효성을 고러한 일수벌금형제의 신설도 바람직한 도입으로 평가된다. 현대 형법에 대한 공동관심사는 종래의 국가주의·치안주의·윤리주의에 치우쳤던 낡은 형법을 일신시켜 개인주의와 이를 위한 법익보호에 집중되어왔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공해와 컴퓨터·인질·항공기납치·자동 판매기 등의 부정한 이용과 사생활 보호에 역점을 둔 이번 개정안은 새로운 추세에 따른 것으로 간주된다. 또 수사기관의 가혹행위 예방에 초점을 둔 진술강요죄의 신설이나 남녀사이의 애정관계에 국가형벌권이 개입하는 것이라며 폐지론이 강하게 일었던 간통죄의 폐지도 당연한 조치인 것 같다. 이밖에 선진 여러 나라에서는 레저나 오락의 영역으로 취급하는 단순도박도 처벌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 역시 적절하다고 본다.
다만 사형범죄범위의 축소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지만 사형의 위하력이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고 현대형벌의 목적이 보복이나 응징에 있지 않고 범인의 재 사회에 있다는 점을 유의해 축소의 폭을 과감히 넓혔으면 한다.
현행 형사법에는 산림훼손이나 공무원 수뢰에까지 사형규정을 두고있지만 이 규정이 이들 범죄 근절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도 의문이고 법의 권위만 실추 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형법 외에 수없이 제정되어 법체계의 혼란을 빚게 했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국가기밀 보호법 등 잡다한 특별법을 이 기회에 재정비해 형법의 틀 안에 흡수시켜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그 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보안처분과 형벌과의 관계도 말끔히 정리하고 행위와 형벌과의 균형을 이루는 형량 조정도 병행했으면 한다.
이밖에 민사분쟁의 형사화라는 논의도 없지 않은 채무 불 이행죄 신설도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마땅하다.
아뭏든 형법개정은 빠를수록 좋지만 서독이나 일본이 개정에 50년 이상 걸려 마무리했다는 점을 명심해 국민 각 계층의 여론을 충분히 수렴해 완벽한 개정이 되도록 노력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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