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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조직 잡고 보니 2030 청년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해 가을, 휴학 중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던 대학생 A씨에게 인터넷 구직사이트에 올라온 구인 모집 안내가 눈에 띄었다.

대학생·취준생·공익요원, 조폭까지...'고액 알바' 인터넷 광고 현혹돼
국내 총책에게 뇌물 받고 수사 정보 알려준 경찰관들도 적발돼

'고액 단기 알바. 최고 대우 보장'

어떤 일을 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단기간에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모집자를 만났다. A씨를 만난 '팀장'은 은행에서 돈을 찾아오는 단순 심부름이라고 했다. 미심쩍었지만 일당 10만~20만원을 쳐준다는 말에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A씨의 일은 단순했다. '팀장'이 건네준 통장을 들고 현금인출기로 지시 받은 돈을 찾아서 갖다 주면 되는 일이었다. 일에 적응이 되자 팀장은 "네가 안 쓰는 통장을 빌려주면 5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계좌를 건네고 사례비를 받았다. 다른 사람의 통장도 가져오면 30만원을 주겠다고도 했다. 그제야 자기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힘 안들이고 돈을 벌려다 어느새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A씨는 검찰의 보이스피싱 조직 수사에 적발돼 처벌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검찰이 적발한 보이스피싱 사기단의 한 사례다. 수원지검은 100일간 보이스피싱 집중 단속을 벌여 중국 콜센터와 연계된 국내 현금인출조직 4개를 적발했다고 26일 밝혔다. 검찰은 54명을 붙잡아 19명을 구속 기소하고 23명을 불구속기소했다. 나머지는 지명수배하거나 수사 중이다

조직의 가장 바닥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대포통장을 수집하는 조직원들 중 상당수는 A씨처럼 용돈을 벌어보려던 청년들이었다. 대학생이거나 재수생, 취업준비생 등 일정한 직업이 없는 이들이다. 이들은 주로 고액 단기 알바를 모집한다는 인터넷 구인광고에 현혹돼 범죄의 늪에 발을 들였다. 인출금의 몇%를 수고비로 받거나 일당 10만~20만원을 받는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인출만 하다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통장을 조직에 건네고 돈을 받기도 했다.

이 밖에 하남시에서 활동하는 폭력조직의 조직원도 있었다. 생활비나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마약 구입 비용을 마련하려고 범행에 가담한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중간관리자와 인출책으로 활동한 B(27), C(21)는 성매매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보이스피싱에도 가담한 것으로 조사됐다.

인출책을 총 지휘하고 대포통장을 수집해 조직에 공급하는 중간관리자도 20대 청년이었다. 검찰 수사 결과 공익근무요원으로 밝혀졌다. 대체 군복무 중이어서 자신이 직접 활동하기가 여의치 않자 다른 이들을 모집해 관리하면서 돈을 챙긴 것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이들을 비호하는 경찰이 있었다. 경찰 D(39)씨는 보이스피싱 인출총책 A(46)로부터 수배 여부 등 수사상황을 알려달란 부탁을 받고 수사 정보를 흘렸다가 적발됐다. 그는 수사정보 제공의 대가로 17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동료 경찰관 두 명에게 A가 관련된 음주운전 무마의 대가로 수백만원을 건네고, 이들과 함께 성접대 등 향응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 관계자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20~30대 청년들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보이스피싱 범죄에 유인되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청년들이 보이스피싱 범죄의 위험성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사회적 캠페인 등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 집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보이스피싱 누적 피해금은 약 7000억원에 달하고, 국민 10명 중 7명은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길용·김민욱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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