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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The New York Times

미 언론의 양비론이 트럼프란 괴물을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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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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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NYT 경제 칼럼니스트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에 올랐다. 그가 지난해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미국인들은 ‘떠버리 사업가의 조크’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트럼프가 경선 가도에서 내뱉은 주장들을 보면 그런 비아냥이 딱 들어맞는다. 그는 정책에 대한 무지를 대놓고 드러냈다. ‘무슬림 전면 입국 금지’ 같은 극단적 주장을 일삼고 인종차별·여성비하 등 비뚤어진 인식을 거리낌없이 보여줬다. 진실 따위는 개의치 않는 태도도 충격을 줬다. 미국 대선 사상 이런 후보는 유례가 없다.

언론의 맹목적 균형 보도
트럼프 문제점 희석하고
힐러리의 티는 극대화해
공익 포기, 무책임의 극치

트럼프가 올 11월 치러질 대선에서 당선될 확률은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보다 떨어진다. 그러나 격차는 크지 않다. 트럼프가 이길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필자는 유권자들이 트럼프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기사를 쓸 때 반드시 여야 후보 양측에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미국 언론의 양비론이 중요한 원인이다. 정치인을 다룰 때면 무조건 양비론을 적용해야 한다는 언론의 맹신이 트럼프란 괴물을 키운 것이다.

물론 트럼프의 성공은 트럼프 본인의 동물적 감각이 큰 역할을 했다. 그가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축적돼 온 분노를 콕 집어 공략한 게 공화당 대선 후보에 오른 핵심 원인이다. 요즘 미국은 남북전쟁 시절 뺨치게 분열된 국가다. 따라서 공화당원 과반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당 공식 후보인 트럼프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정책이나 인품을 따져볼 시간이 없는 부동층은 TV나 신문 보도를 통해 트럼프의 됨됨이를 판단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들이 매일 접하는 트럼프 관련 뉴스는 관성적인 양비론에 기반한 왜곡된 내용이기 십상이다.

물론 미 언론의 양비론은 과거에도 있었다. 2000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조지 W 부시는 자신의 공약과 관련해 대놓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상위 1% 부자들에게 압도적 혜택을 안겨줄 감세안을 준비했다. 그러나 유세장에선 이 공약이 ‘중산층을 위한 정책’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이 주장이 거짓임을 지적하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답답한 나머지 이런 칼럼을 쓰기도 했다. “대선 토론에서 지구의 모양을 놓고 한쪽 당 후보가 ‘둥글다’고 주장하자 다른 당 후보가 ‘평평하다’고 반박했다. 다음날 언론들은 ‘지구의 모양: 두 후보 주장 모두 일리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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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론에 매달리는 언론 덕분에 득을 본 정치인은 부시뿐이 아니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적자 재정을 막기 위해 예산안을 꼼꼼히 챙기는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실제 제출한 정책들은 놀랍도록 허술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다. 이런 그가 재정 전문가란 명성을 얻은 건 오로지 언론 덕분이다. 민주당 정부에 맞서 공화당에도 성실한 경제통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양비론’ 때문에 언론들이 사기꾼이나 다를 바 없는 라이언에게 말도 안 되는 칭호를 안겨준 것이다.

라이언이 사기꾼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면, 트럼프는 진짜 사기꾼에 해당한다. 그는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해 사실확인에 나서기도 벅차다. 심지어 거짓임이 입증됐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같은 주장을 이어 간다. 언론에 대해서도 조폭 수준의 협박과 선동을 일삼는다. 이런 사람이라면 언론도 양비론에서 해방돼 마음껏 비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부 언론은 트럼프의 문제점을 찾아내 비판했다. 하지만 이들조차 그 한심한 양비론에 집착해 동일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 클린턴의 사소한 잘못들을 보도하기 바빴다. 그 결과 클린턴에겐 트럼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비판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 며칠은 미국 언론의 양비론식 보도가 특히 두드러진 기간이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단 전임 간사와 후임 간사가 “트럼프와 클린턴은 모두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정치인”이란 칼럼을 공동 작성한 것이다. 클린턴이 트럼프만큼이나 언론에 위협적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보니 가관이었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사 기자들을 콕 찍어 대선 캠프 출입을 막았다. 트럼프의 열혈 지지자들이 문제의 기자들을 욕하고 공격해도 막지 않았다. 반면 클린턴은 자신에 비판적인 기자들의 캠프 출입을 막거나 욕설을 하지 않았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해 주는 전담 직원도 뒀다. 다만 기자회견을 여는 것은 꺼렸다. 문제의 칼럼은 바로 이 대목을 문제 삼으며 “트럼프나 클린턴이나 똑같이 언론에 위협”이라 주장한 것이다.

누가 봐도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의 이 칼럼은 당연히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러자 칼럼을 작성한 기자들은 “두 후보의 행동이 유사하다는 뜻으로 쓴 글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이들은 트럼프와 클린턴 중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양비론은 언론의 오래된 책임회피 수단이다. 하지만 트럼프 같은 위험한 사람이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 상황에서도 ‘힐러리나 트럼프나 마찬가지’란 입장을 고수하는 건 무책임의 극치다.

폴 크루그먼 NYT 경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