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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함락 100일] 5·끝 재건에 앞장서는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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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한국인들이 혼란과 무질서의 한복판에서 이라크인들과 함께 뛰고 있다. 섭씨 50도가 넘는 더위, 끊이지 않는 총성, 열악한 생활환경을 무릅쓴 채.

◆코리아 타운=지난 7일 이라크 남부의 나시리야. 중심가에 도착하자 이라크인들이 모여든다. 입도 뻥긋하지 않았는데 이미 나의 행선지를 알고 있다는 듯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 걸음을 재촉하자 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리기도 했다. 잠시 후 뜨거운 열풍에 휘날리는 태극기와 이라크기가 나타났다.

건물 입구에는 '나시리야시(市) 공공병원'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이전에는 나시리야의 바트당 당사였다. 한국 젊은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복구 공사를 하고 있다. 한국군 공병부대인 서희부대의 장병들이다. 정문 왼쪽에는 '한국은 이라크를 사랑해요'라고 아랍어로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다.

이라크 전역을 돌아다녔지만 어느 외국군의 활동현장에도 볼 수 없던 문구다. 서희부대 장병 근처를 오가는 이라크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이 병원은 11일 개원했다.

나시리야시를 벗어나 15분을 달리니 '탈릴 공군기지'가 나온다. 미군은 '애더 군수기지'로 부른다. 이라크 주둔 미군에게 장비와 물자를 공급하는 곳이다. 이 기지 안에 한국이 파병한 서희부대와 제마부대원들이 1백50여개의 막사를 치고 주둔하고 있다.

서희부대는 나시리야 병원.학교.축구장 등 시내 다섯곳에서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제마부대는 이라크인과 미군.영국군의 진료를 담당하는 의료지원부대다. 한방진료도 한다.

서희부대장 최광연(50)대령의 막사에 들어가니 놀러온 이라크인 오누이가 보였다. 이 어린이들은 崔대령을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최근 주민들이 "귀국하지 말고 나시리야 시장에 출마하라"고 권했을 정도로 그는 현지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우리 장비는 이라크인들의 것, 원하면 어디든 즉시 간다'는 모토를 걸어놓고 복구 작업을 적극 지원하면서 한국 구호단체들과 연계해 구호작업도 열성적으로 펼치자 현지인들이 감동한 것이다. 崔대령은 "이곳에 코리아 타운을 만들고 싶다"며 한국과 이라크의 우정 어린 협력을 강조했다.

제마부대도 인기가 높다. 현지 주민들이 외국군 주둔지에 오기를 꺼리자 제마부대는 주민을 찾아 부대 밖으로 정기 순회진료를 나갔는데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부대장 김용규(44)중령은 "이제 이라크인들이 현지 병원보다 우리를 더 선호해 일손이 부족할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군 의료지원단이 '이라크인들의 의사'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5만㎞의 근무=한국군 이라크 파병부대가 남쪽에서 '한국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면 이라크 대사대리인 박웅철(43)서기관은 지난 2년간 이라크와 요르단을 오가며 한국인의 이라크 진출로를 뚫고 있다.

그는 불안정한 이라크 정치상황으로 요르단 암만과 바그다드에 각각 사무실을 두고 양쪽을 수시로 오갔다. 그동안 다닌 사막길이 5만㎞를 넘는다.

바그다드의 한국대사관이 약탈 당해 가족과 떨어져 호텔에서 숙식하며 일하고 있지만 그는 이곳에 진출할 한국인들에게 길을 터준다는 생각에 밤잠을 잊고 있었다.

외무부 정용칠(49)심의관은 군정 임시행정처에 자문관으로 파견돼 근무하고 있다. 그는 "섭씨 50도가 넘는 기온 속에 에어컨도 없는 막사와 이동 카라반에서 생활하던 처음엔 무척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행정처의 업무에 이라크인과 국제사회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같아요"=공식적인 활동 외에도 이라크 재건에 발벗고 나선 여러 구호단체들의 노력도 주목할 만하다. 이라크 반전평화팀, 이웃사랑회, 월드비전, 글로벌 케어, 기아대책 등 다양한 단체의 봉사원들이 전후 이라크인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

바그다드 시내에서 만난 이미자(43)씨는 '개인적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에서 유치원을 경영하던 李씨는 언론에서 어려운 이라크 상황을 접하고 며칠 만에 짐을 싸 기아대책팀에 합류해 이곳에 왔다.

그는 "남편이 내 결정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줘 기쁘다"며 "아픔을 호소하던 이라크 아이들이 나의 도움으로 웃음을 되찾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이라크에서 비극을 겪은 한국인도 있다. 지난 5월 22일 오전 3시30분 바그다드의 야르무크 지역. 현대건설 바그다드 사무소 이영철(54)소장은 자택 거실에서 총성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담장을 넘어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온 미군들이 소총탄 26발을 거실에 난사했다. 후세인 정권의 고위지도자와 저항세력 체포작전을 벌이던 미군이 李소장집 주변 20가구를 이 같은 방식으로 수색한 것이다.

한 시간 만에 상황이 종결되고 李소장은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약탈을 막기 위해 같이 거주하던 동서 우마르 무스타파(36)가 보이지 않았다.

기자가 방문한 10일에도 李소장은 행정처를 방문, 동서의 행방을 문의했다. 그러나 "기다려 보라"는 얘기만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李소장의 표정은 무겁기만 하다.

서정민 중동전문기자

<사진 설명 전문>
한국군 서희부대 장병들(왼쪽 두 사람)이 나시리야 공공병원 개원을 위한 작업을 하는 동안 이라크 소년들이 지켜보고 있다. 뒤쪽에 아랍어로 ‘한국은 이라크를 사랑해요’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나시리야=서정민 중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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