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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한 위치 설 때까지 최대한 브렉시트 협상 미룰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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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11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왼쪽)와 니컬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이 15일(현지시간)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 관저에서 만났다. 메이 총리는 “수세기 동안 지속된 영국의 통합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에든버러 AP=뉴시스]

3주 전 영국은 유럽연합(EU)을 떠나는 데 투표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물러나고, 테리사 메이가 새 총리로 취임했다. 이번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인 못지않게 나 역시 깜짝 놀랐다. 내 주변 사람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런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잔류에 투표했다.


하지만 우리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잔류에 반대했다. 탈퇴 찬성파의 구호는 “우리나라를 돌려받자”였다. 이들은 EU로부터 얻는 혜택이 없다고 믿는다. 주관 없는 브뤼셀의 관료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EU는 창문 밖에 꽃바구니를 거는 것에 대한 규칙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영국 시골마을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뭐라고 하기 전에 몇 세기 동안 꽃바구니를 걸었다. EU는 소시지 성분에 대한 규칙도 발표했다. 영국인들은 한국의 김치처럼 지역별 특산 소시지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한 그들은 이민자에 대한 분노가 있다. 내전을 겪고 있는 이라크·시리아·아프가니스탄에서 많은 이들이 영국으로 왔다. 2015년까지 210만 명의 동유럽 사람들도 영국에 입국했다. 가난한 동유럽인들에겐 영국의 기본 임금도 거금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공원 등에 모여 보드카를 병째로 들이켜는 사람들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동유럽 사람들은 학교와 병원을 가득 채우고 낯선 언어로 이야기한다. 공장을 관리하는 한 친구는 이민자들이 유입되는 것 자체는 꺼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폴란드 직원들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외국인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까지 납득하기는 어렵다고 토로했다.


불신감 팽배 “정부가 부정선거” 유언비어도영국인들은 정부의 일처리에 대해서도 깊은 불신이 있다. 1975년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투표에서 67%가 찬성표를 던졌다. EEC가 영국 무역에 좋다고 정부가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은 이상한 규정이나 대량 이민 정책에 대해 알려주지 않고 속였다고 생각한다. 이 불신은 꽤 깊었다. 투표 당일엔 정부기관이 투표 용지의 ‘탈퇴’ 표시를 지우고 ‘잔류’로 바꿀 것이란 유언비어까지 돌았다.


국민투표 이후 감정적인 대립은 여전하다. 사무실과 가정에서 말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상당수 기성세대가 탈퇴에 투표한 반면 비극적으로 투표율이 낮은 젊은 세대 대부분은 잔류를 선택했다. 젊은 세대는 이기적인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미래를 망쳤다고 생각한다. 국민투표 이후 젊은이들이 런던 지하철에서 더 이상 내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EU 잔류에 투표했음’이란 배지를 달고 있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런던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는 잔류에 투표했다. 만약 영국이 정말로 EU를 탈퇴한다면 스코틀랜드인들은 늘 그랬듯이 자신들의 의견이 무시됐다고 느낄 것이다. 웨일스도 상황이 비슷하다. 웨일스 전체로 보면 탈퇴가 많았지만 영어가 아닌 웨일스어를 주로 쓰는 지방에서는 잔류에 투표한 사람이 더 많았다. 두 진영 사이의 긴장감은 어느 때보다 강하다.


국민투표의 결과가 영국과 EU 그리고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은 확실치 않다. 영국은 즉각적인 경제적 피해를 봤다. 여름휴가철을 앞두고 파운드화의 가치는 가파르게 하락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에서 휴가를 보내려던 사람들은 예상보다 더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됐다. 주식시장은 출렁이는 중이고 자산 시장이 무너졌다는 소문도 들린다. 신용평가사들은 영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낮췄다. 잔류파는 영국이 EU를 탈퇴하면 장기적으로 영국의 EU 대상 수출품목에 최고 48%의 관세가 부과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탈퇴파는 EU가 아닌 다른 곳과 무역을 할 수 있고, 매주 내던 2억 파운드(약 3030억원)의 EU 분담금으로 무역에서 입는 손실을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 지켜보자.


EU는 여전히 브렉시트의 여파에 흔들리고 있다. 영국이 막강한 경제력과 외교력을 가진 국가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EU 회원국 중 첫 번째 탈퇴 사례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EU의 몇몇 회원국에서도 국민투표를 진행하면 영국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자리를 찾으러 서유럽에 온 가난한 동유럽 출신 이주민과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인 브뤼셀의 관료주의에 대한 분노는 영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EU는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 영국의 탈퇴 결정을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의 결과로 몰고 있다.


가난한 목사의 딸로 공립학교 나온 메이영국이 EU 예산에 적지 않게 기여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EU의 재정은 취약해질 것이다. 모스크바와 이슬람국가(IS)는 브렉시트로 인한 EU의 약화를 반긴다. 나는 많은 중국인이 이번 결과에 남몰래 기뻐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블로그에선 영국의 국민투표가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를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영국의 결정에 크게 실망했다. 반면 영국이 EU의 초국가적 통합을 오랫동안 반대해 왔기 때문에 EU 내에서 통합을 바라던 사람들에게 힘이 실릴 것이다. EU 약화의 영향이 어떨지는 알기 어렵지만 긍정적일 가능성은 작다.


한편 이번 국민투표는 영국 정치에 충격을 몰고 왔다. 노동당에서는 대표 자리를 놓고 경선이 벌어졌다. 브렉시트를 가장 강하게 이끌었던 영국독립당(UKIP)은 붕괴 조짐을 보인다. 가장 큰 충격은 결과가 나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뤄진 캐머런 총리의 사임 발표였다. 그는 영국의 EU 잔류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캐머런 총리의 사임 발표는 다른 뉴스에 묻혀 그날 헤드라인에 오르지도 못했다. 우리는 분명 이상한 시기를 겪고 있다.


영국 헌법상 총리는 선거가 아니라 의회 다수당 의원들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캐머런의 사임은 투표가 아닌 보수당 내부의 리더십 경쟁을 촉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EU 탈퇴 주장을 통해 입지를 넓혀 총리가 되려 했던 정치인들의 노력은 허사가 됐다. 이달 13일 여왕은 메이에게 새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메이가 세계 지도자들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했던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을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에 놀란 사람이 적지 않다. 존슨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반(半) 케냐인’이라고 공격했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해리 포터에서 나오는 드워프(난쟁이족)로 묘사했으며,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에 대한 무례한 시를 썼다. 메이는 영리하다. 잔류파인 메이는 브렉시트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려면 탈퇴파를 핵심 자리에 배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했고 EU의 지원 없이도 영국의 농업이 번성할 수 있다고 말해 온 앤드리아 레드섬 차관에겐 환경식품농무장관을, 자유무역협정(FTA)을 2년 내에 맺을 수 있기 때문에 EU를 떠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데이비드 데이비스 의원에겐 브렉시트부 장관을 맡겼다. 메이는 “잘될 것이라고 말했으니 이제 되게 하라”고 압박한 셈이다.


메이는 질 수 없다. 이들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브렉시트가 성공한 것이고 자신은 그 팀의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이 실패하면 EU를 떠나자고 주장해 온 대표자들이 타격을 받게 된다.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존슨이 다우닝가 10번지를 떠나는 사진을 보면 이런 상황이 단번에 이해가 된다. 존슨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존슨은 바보가 아니다. 자신의 입방정 때문에 외교에 실패하면 자신의 명성은 무너져 내릴 것을 안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경력이 끝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메이는 많은 부분에서 캐머런과 다르다. 당연한 얘기지만 캐머런은 남성이고 메이는 여성이다. 캐머런은 자녀가 있지만 메이는 없다. 캐머런은 메이보다 열 살이나 젊다. 메이는 지난 40년 동안의 영국 총리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캐머런은 유복한 환경에서 사립학교에 다녔지만 메이는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나 공립학교에 다녔다. 메이의 배경을 감안하면 그가 총리 취임 후 첫 연설에서 “소수의 특권층이 아닌 모두를 위한 영국”을 약속한 것은 놀랍지 않다.


캐머런은 당구를 치거나 영화를 보며 쉬지만 메이의 취미는 요리다. 메이는 100권이 넘는 요리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캐머런은 타고난 소통가인데 반해 메이는 자기 감정이나 의견에 대해 말을 잘하지 않는다. 메이는 아주 부지런하고 세세한 부분을 챙기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캐머런이 조정자라면 메이는 싸움꾼이자 ‘터프 우먼’이다.


메이가 캐머런 밑에서 내무부 장관을 맡았을 때 다른 장관들과의 사이에서 종종 마찰을 빚곤 했다. 그러나 결국에 다른 장관들은 메이의 진실성과 일관성에 존경을 표했다. 메이의 친구들은 “메이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적 포부가 남달랐다”고 말했다. 메이는 영국의 첫 번째 여성 총리가 되고 싶어했기에 마거릿 대처가 총리가 됐을 때 크게 실망했다. 메이는 부지런하고 금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키튼힐(3~5㎝ 정도의 굽으로 된 구두)과 같은 신발에 취미가 있다고 한다. 어찌됐든 메이는 운이 아닌 실력으로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다. 메이는 새 내각에서 캐머런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제외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줬다.


고양이만도 못한 영국인 신세잔류파였던 메이는 앞으로 강한 면모를 보일 필요가 있다. 총선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보수당 규정대로라면 최종 두 명의 후보를 두고 보수당 의원들이 결선투표를 진행하고, 여기서 뽑힌 사람은 의회에서 전체 투표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메이의 경쟁 후보가 기권함으로써 메이는 당 내부에서조차도 투표를 통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고로 그의 정치적 입지는 취약하다. 그러나 메이는 “조기 총선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지난해 총선을 한 데다 얼마 전 국민투표까지 거친 상황인 만큼 투표에 대한 피로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메이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서 EU와 협상해야 한다. EU 규정에 따르면 회원국의 탈퇴 의사 표시와 실제 탈퇴 사이에는 2년 동안의 유예 기간이 있다. 이 기간 중 무역 등에 관해 협의를 마치지 않으면 영국은 EU의 높은 역외관세를 적용받게 된다. 메이는 적어도 연말까지는 EU와의 협상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가 훨씬 오랫동안 협상을 미룰 것이라고 예상한다. 일단 협상이 시작되면 EU가 주도권을 쥐는 만큼 영국은 유리한 위치에 설 때까지 탈퇴 절차를 미루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협상을 미루는 기간이 길어지면 정국이 바뀌어 국민투표 결과도 뒤집어질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메이는 국민투표의 결과를 지켜 EU와의 협상에서 최상의 결과를 끌어내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브렉시트는 브렉시트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에 사는 고양이 래리가 관심을 끌었다. 영국인들은 2011년부터 총리 관저에 살던 래리가 총리 교체로 집을 잃게 될까 걱정했다. 그러나 메이는 첫 번째 정책 발표에서 래리가 다우닝가 10번지에 계속 살며 자기가 원하는 쥐를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양이도 머물 집이 있는데 영국은 머물 곳조차 없다(So at least there is continuity in cat politics, even if not in human politics).


존 에버라드 전 평양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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