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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된 인간성에 바치는 한판 굿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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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30면

대표작 ‘푸르른 날에’로 지난 5년간 매년 5월의 남산을 물들였던 고선웅 연출이 올해는 신작으로 남산에 입성했다. 연극 ‘곰의 아내’는 남산예술센터를 운영하는 서울문화재단과 극공작소 마방진이 공동 제작한 작품. 2011년 서울문화재단이 제작한 ‘푸르른 날에’로 스타 연출가로 등극한 고선웅이 어떤 작품으로 ‘푸르른 날에’를 대체할지 관심이 집중됐다.


그는 요즘 공연계에서 가장 핫한 연출가다. 2014년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찍고 옹녀’로 차범석 희곡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으로 동아연극상 대상과 연출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올해는 ‘변강쇠 점찍고 옹녀’가 세계 공연예술의 메카로 통하는 파리 테아트르 드 라 빌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됐고, 국립극단과는 지난 3월 기발한 컨셉의 공동창작물 ‘한국인의 초상’에 이어 10월 ‘산허구리’까지 초연을 앞두고 있다. 국립창극단과도 신작 ‘흥보씨’를 확정지었다. 이쯤되면 ‘국공립단체가 가장 사랑하는 연출가’라 할만하다.


‘곰의 아내’는 고연옥 작가의 2015년 벽산희곡상 수상작 ‘처의 감각’이 원작이라 무게감이 더하다. 고연옥 역시 최근 몇 년간 대한민국연극대상, 서울연극제 등에서 희곡상을 휩쓸고 있는 극작가다. 2009년 남산예술센터 개관공연 ‘오늘, 손님 오신다’로 고선웅과 호흡을 맞춘 바 있지만 이번 무대의 색깔은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그간 두 사람은 각자의 뚜렷한 작가주의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고연옥은 신문 사회면에 실릴 법한 사건사고의 어두운 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작가다. 답이 없는 비관적인 상황으로 관객을 몰아넣는 것이 주특기다. 고선웅은 정반대다. 역사적 비극이건 인간의 비루함이건 그의 시선을 통하면 모두 화해와 희망으로 세탁된다. 광주의 비극(‘푸르른 날에’)도 나라 잃은 설움(‘아리랑’)도, 세상의 역사보다 훨씬 더 거대한 개인의 역사 차원에서 치유와 용서를 모색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웅녀 신화를 모티브 삼은 ‘곰의 아내’의 정체는 뭘까. 그것은 어쩌면 상실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한 질문 그 자체다. 고연옥의 신화적 상상력은 인간의 현재를 가리키고, 고선웅 특유의 과장적이고 연극적인 메소드는 현실을 다시 제의로 돌려보낸다.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다움이란 정녕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해답 없이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가 된다.

사회에 적응 못해 숲에서 자살을 시도한 젊은 남자를 한 여자가 구해낸다. 여자는 숲에서 곰의 아기를 낳고 살아온 야생의 존재. 사냥꾼 때문에 아기를 잃고 곰 남편을 찾아 헤매던 그녀는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되고, 내친김에 둘은 도시에서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사랑없는 결혼과 가장으로서의 책임에 지친 남자는 결국 첫사랑을 찾아 떠나고, 남겨진 여자는 다시 곰 남편을 찾아 숲으로 향하며 각자 처음 상태로 돌아간다.


민망하리만큼 비루한 인간 본성을 들이대며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고연옥은 이번엔 그 이중성을 파헤쳤다. 사실 인간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으로 동물과 다를 바 없지만, 사회 규범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중성이 일견 뚜렷한 이분법으로 그려져 불편함을 더한다. 이별한 남편을 찾는다던 여자는 아무 고민 없이 외간남자의 아이를 주렁주렁 낳으며 ‘원초적 본능’에 충실한 반면, 사랑 없이 결혼한 남자는 책임감 때문에 적응도 안 되는 사회생활을 감당하며 고뇌하니 말이다.


생명과 자연을 상징하는 여성과 문명과 파괴를 대변하는 남성이라는 식상한 대립구도가 웬 말인가 싶지만 결말은 반전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떠난다’는 남자와 ‘인간다움’에서 소외됐지만 기꺼이 처음으로 돌아가겠다는 여자는 둘 다 상식적인 인간다움을 넘어선 각자의 ‘순수’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성 상실의 사태엔 사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단지 모두가 ‘순수’를 잃어버렸을 뿐이다.


고연옥의 희곡과 고선웅의 무대는 결말이 묘하게 다르다. 곰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해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는 선명한 비극으로 끝나는 원작에서 고선웅이 또다시 희망을 건져 올린 것이다. 여자는 아이들을 들쳐 업은 채로 현실인지 환상인지, 이승인지 저승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곰 남편과 만난다. 장엄한 음악, 그리고 한발의 총성과 함께 이야기는 다시 신화가 된다.


신화 속으로 돌아간 곰의 아내는 신과 인간,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샤먼의 지위를 회복한다. 비극이건 희극이건, 고 작가나 고 연출은 둘 다 이 시대의 ‘샤먼’이라 할 연극에게 순수를 상실한 인간의 문제를 의탁하려 했음은 틀림없다. 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질문을 던지는 데서 희망은 시작된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사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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