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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의 쟁점<14>미·소간 냉전 격화가 낳은 산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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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45년12월 한국문제에 관한 모스크바협정이 발표된 때로부터 1947년9월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기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불과 1년9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일어난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놀라운 변화는 한국문제와 관련된 이 두사건이 전혀 다른 의미에서 명확히 반영되고 있다. 전자가 미소간의 합의와 협조에 의한 한반도문제 해결의 시도를 표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후자는 그러한 시도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으로 격발된 찬탁과 반탁의 싸움, 그리고 그것에 연기된 남북협상론과 단정론의 대립을 둘러싸고 각기 주장과 이해를 달리하는 갖가지 내·외세 사이에 뒤얽혀 일어났던 착잡한 갈등이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으로 일단락 짓게 된것은 되풀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은 그러한 미국의 정책전환을 애써 유도하려했던 이승만의 승리를 뜻했으며 그것은 곧 단선단정론의 승리로 사연 많던 싸움의 결판이 내려진 것을 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한국문제가 그렇게 귀착될 수밖에 없었던가에 관해서는 이상론과 현실론의 평가가 어차피 엇갈릴수 밖에 없겠으나 적어도 당시의 국제적 상황의 측면에서 볼때는 그런 방향으로 한국문제가 유도되기 쉬운 요인들이 분명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한국문제가 그렇게 귀착되기까지에는 당시의 극우세력을 이끌고 있던 이승만의 외교적 작위가 큰 구실을 했다는 지적에 있어서는 이완고한 반공투사의 친구나 적사이에서 일치점을 찾을 수 있긴하다.

<노회한 외교술 번뜩|미정책 변화를 예지>
가령 이 노지도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올리버」나 다른 한편으로 그의 정적이었던 좌익계및 남북협상파 인사들이 각기 다른 뜻에서 단정실현 과정에서의 이승만의 역할을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강조한 것을 볼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그 노화한 외교적 판단 때문에 일찍부터 미국정책의 변화를 예지하고 국제적 대세의 흐름을 타고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좀더 정확한 이야기가 될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당초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의 이니셔티브가 미소 양국 가운데 어느 쪽에 있었든간에 모스크바협정이 이 두나라간의 절충에서 산출된 것이 틀림 없다면 그 협정의 이행여부는 어차피 전반적인 양국관계의 향배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한국문제에 관한 모스크바협정」은「번즈」미 국무장관이 내어 놓은「한반도에 대한 미·영·중·소 4대국 신탁통치안」및「한국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한국통일 행정부창설안」과 「몰로토프」 소련외상이 내어 놓은「한국인에 의한 과도적 임시성부 수립과 이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창설안」의 절충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절충이 가능했던 것은 1945년말까지는 2차대전중 같은 연합국으로 협력했던 미 소양국관계가 아직 결정적으로 악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으나 이 협정의 실천은 처음부터 미소공동위원회의 교착에서 볼수 있었듯이 암초에 걸렸으며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될 때까지 양국간에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아무런 진전도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1947년 봄부터는 이미 미소간의 냉전관계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굳어졌다.
그해 9월17일「마셜」미국무장관은 그러한 미소관계 변화를 배경으로『과거 2년간 미국은 모스크바 결정을 실천하는 방도를 소련과 합의하여 한국을 독립시키려 노력하였으나 한국의 독립과업은 2년전에 비해 조금도 진전된바 없다.』고 전제하고『한국문제가 유엔총회에 상정됨에 따라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한국을 독립시키는 수단이 강구되기를 바란다.』고 말함으로써 한국문제에 관한 소련과의 협조에 명백한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미국의 압도적 영향아래 놓인 유엔총회운영위원회는「마셜」장관의 한국독립문제에 관한 제안을 총회토의사항에 삽입하자는 결의안을 12대2로 가결했다. 미국으로서도 급속히 적대화 되어가는 소련을 상대로 한국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그 문제를 보다 손쉬운 유엔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훨씬 편리했을 것이다.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된 1947년 가을에는 이미 그해 봄에 발표된「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의 도미노 이론에 따른 소련팽창주의 봉쇄의 정책의지가 명백히 드러난 때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유엔이관에서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마셜」은 바로 대소봉쇄조치의 하나로 유명한「마셜플랜」의 설계자였다. 미국무성과 군정당국의 공산주의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를 평소 못마땅해하던 이승만도 1947년1월 25일 미국체재중 미국무성안에 한국독립을 방해하고 있는 일부관리를 공산주의 동조자로 신랄히 비난하면서도『「마셜」씨의 국무장관 취임을 계기로 이들 좌익분자는 미국무성으로부터 일소될 가능성이 있음을 듣고있다.』고 말함으로써「마셜」에 대해서는 호감과 기대를 표시했을 정도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2차대전 종료는 미소간의 또다른 제국적 경쟁의 시작이었다. 2차대전 이후까지 양국간의 협조가 연장될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믿었던 서방의 일반적 기대와는 달리 이미 얄타회담 당시부터 노출되기 시작한 소련의 팽창주의적 관심은 나치독일의 패망이 남겨놓은 유럽의 힘의 공백을 미소양국이 메워 나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선명히 드러났다. 급속한 냉전에로의 사태진전이 있었던 1945∼1946년의 기간에 걸쳐「스탈린」은 그 절대주의적 안보관에 따라 스테틴―트리에스트선 이동의 유럽 전체에 걸친 전면적 헤게모니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제국이 소련의 서부국경으로부터 서유럽에 걸친 광대한 지역 전체를 지배하게 된 셈이다.
아시아와 극동지역에서도 소련의 팽창은 예외가 아니었다. 소련은 우선 전쟁중 점령한 북부 이란으로부터의 철수를 지연시켰다. 결국 압력에 밀려 철수하기는 했으되 소련은 철수의 대가를 찾는데 집요했다. 극동에 있어서도 얄타에서 체결된 비밀협정에 따라 노일전쟁 발발 이전이었던 1904년 당시보다도 더큰 제국적 세력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 일관된 정책결여|대한정책구상 모호>
1947년에 이르러 미소는「트루먼 독트린」과 즈다노프노선의 정면대립 가운데 세계를 2개의적대적 진영으로 분할하고 냉전을 제도화시켰다. 물론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미국은 비교적 일관성 있고 명료한 유럽에서의 대소봉쇄정책과는 달리 극동에서는 확고하고도 일관성 있는 정책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전후 초기의 극동정책에서 인도차이나문제와 중국문제, 그리고 한반도문제와 일본문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생각없이 그것들을 마치 분리된 별개의 문제처럼 다루려는 안이성을 노출했다.
한반도의 적화가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짐짓 냉담한 것처럼 보일때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당시 미국의 해외주둔병력의 부족 때문에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짐짓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고 따라서 신탁통치안을 포함하는 대한정책구상에서 모호하고 불확실한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것이 곧 한반도가 미국의 냉전적 관심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 공산화의 위험을 경고하고 걱정하는 반응은 미국무성과 의회의 일각에서 일찍부터 일고 있었다. 결국 미국의 대공봉쇄의 세계화 필요성을 강력히 시사한 NSC성(국가안보회의연구보고서68호)이 그 뒤에 나오게 된 것도 단순히 돌발적으로 소련의 핵탄실험에 자극된 것이기 보다는 미리부터 미국정부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숙되어온 정책사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1947년 봄 이후로는 미국이 소련과 전혀 별개로 한반도문제 해결을 강구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인식이 확실해졌고 결국 남한에서의 단정실현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과 남한단정의 실현은 미소간의 냉전 격하가 낳은 산물이며 한국문제로 인한 미국의 대내·외적 갈등과 부담을 줄이는 편의적 대결의 돌파구였다. 말할것도 없이―미국 지배하의 유엔은 이러한 미국의 현실적 해결책을 어려움 없이 합법화시키고 뒷받침 했다.
1947년11월14일 제2차유엔정기총회전체회의는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은 한국독립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통일안을 43대0 (기권6) 으로 가결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한국문제의 진통이 유엔이관으로 일단락되기까지에는 강대국 정치의 작용만이 아니라 국내정국의 소용돌이 또한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장과 이해를 달리하는 국내 제세력간의 부단한 갈등과 투쟁을 통한 좌익과 중도파, 그리고 민족적 이상주의자들의 도태과정이었다. 그 굴곡 심한 투쟁의 과정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중심의 냉전적 현실주의에 집착한 반공보수세력이었다.
건준과 한민당, 인공과 임정, 독촉과 민전의 싸움이 끊길 사이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찬탁과 반탁, 단정론과 남북협상논의 갈등이 해방정국의 혼란을 더욱 가중하고 그위에 좌우합작과 친일파처단, 그리고 미소공위와 토지개혁을 둘러싼 어지러운 시비와 공방이 민족통일을 위한 자주적 기반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처음부터 아예 가닥이 다른 이교도였던 공산당 세력파의 결별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중도파와 우익세력은 왜 타협과 단합의 기회를 놓쳤는지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념적 양극화의 시대적 풍토에서 김규식·여운형중심의 중도파가 그 설땅을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민족단합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은 비록 허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동기마저 왜 깡그리 무원칙한 좌경기회주의로 매도되어야만 했던지 아쉬운 일이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그나마 반탁과 반공의 공감으로 뭉쳐졌던 이승만·김구중심의 우익민족진영의 단합마저 독립실현의 방법에 관한 이견으로 깨어져야만했다는 사실이다.

<연약한 정치적체질|상당기간 보호받아>
특히 이 두 민족진영 거두의 대립과 분열은 그 뒤 대한민국의 수립이후에 있어서도 그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으므로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되고 난 직후인 1947년12월에만 하더라도『이승만박사와 김구선생 양영수의 의도를 받들어』민족대표자대회와 국민의회와의 합동문제가 제기되고 양측대표간에「협상서」라는 것이 발표된 일이있다.
이 협상서가 발표되기 전날인12월1일 김구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결정한 유엔결의안을 지지하면서『…만일 일보를 퇴하여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하더라도 추후 하시에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러한 김구의 견해는 이승만의 주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고 양지도자 간에는 그 주장에 관한한 충분히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갈려 있어야만 했던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데가 있다.
결국 이것은 뒤에 김구의 통일 지상론이 이승만의 현실적 단정론과 유난히 대조적으로 보이게 만듬으로써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2개의 갈등적 흐름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이합집산 가운데 거의 원시적인 분열의 충동에 휘말렸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겨우 건져낸 대한민국이 결국 상당한 성년에 이르기까지 국제연합이라는 인큐베이터속에서 그 연약한 정치적 체질을 보호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배경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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